[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너머의 아름다움
2011-05-26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복제를 통해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랑을 카피하다>

<사랑을 카피하다>를 본 관객이라면 두 남녀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 하는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두 사람이 낯선 관계라면 두 사람은 영화 중반부터 부부 관계를 흉내낸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두 사람이 부부였다면 두 사람은 부부로서 옥신각신하는 영화 중반부까지 낯선 관계처럼 연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설은 논리적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관계, 그러니까 둘 중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키아로스타미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이 둘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리는 일은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사랑을 카피하다>가 진품 이상으로 가치있는 복제품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면 이는 낯선 두 사람이 부부의 역할극에 빠져드는 내용의 영화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낯선 두 사람이 부부인 척 행세하면서 진짜 부부 이상으로 그 진실과 본질을 보여줄 때만, 원본 이상의 가치를 갖는 복제품이라는 자신의 주제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을 카피하다>는 예술에서의 진품과 복제품의 관계보다는 삶(원본)과 예술(복제품)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사랑을 카피하다>는 어떻게 예술(또는 영화)이라는 복제품이 우리의 실제적 경험(원본)보다 삶의 진실을 더 또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을 인식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원본보다 탁월해지는 모작이라고?

정한석이 지적한 바 있듯이(<씨네21> 801호), 키아로스타미에게 예술의 가치는 작품 자체가 아닌 그에 대한 관람자의 반응에 있다. 먼저 내가 이러한 논의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키아로스타미가 이러한 관람자의 반응을 ‘무엇’에 대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마저 현실의 지오콘다에 대한 복제일 수 있다는 제임스의 생각이 키아로스타미의 예술관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면 이러한 의문은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원본과 복제품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분수대에 자리한 석상에 관해 두 사람이 논쟁할 때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분수대 석상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석상에 대해 논쟁하는 그들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 석상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제임스(윌리엄 시멜)와 여인(줄리엣 비노쉬)은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논쟁에 치중한다. 물론 이는 키아로스타미가 <쉬린>(2008)에서 보여준 연출 방식과 유사하다. 이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상연 중인 <코스로우와 쉬린>을 전면화하는 대신에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다채로운 표정과 감정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연출 전략을 선보인다.

이러한 장면 연출은 키아로스타미가 생각하는 영화(예술)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 석상이 (얼핏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임에도)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인물들에게 특정한 감상과 해석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고려할 사실은, 만약 제임스의 주장처럼 예술이 현실(의 어떤 대상)이라는 원본의 모방이라면 그 복제품이 불러일으킨 반응은 복제된 현실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복제품 자체에 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원본만큼이나 복제품 역시 가치있다고 이야기하는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단순하게 말한다면’ 원본은 분명 존재하며 복제품만큼이나 중요하다. 다만, 키아로스타미는 원본의 본질적 가치는 그 자체에 어떠한 것으로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불러일으킨 현상(관람자의 감상과 해석) 안에서 실현된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복제품이 원본만큼이나 또는 원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본 자체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가치와 본질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키아로스타미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반응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구분하려는 행위다. ‘기막힌 복제품’, 또는 ‘공인받은 모사’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경계(현실이라는 원본과 그에 대한 복제간의 경계)를 무화시킨 작품이며, 따라서 그 반응은 둘 중 하나에 대한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역할극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은 키아로스타미가 왜 부부간의 삶의 진실을 진짜 부부가 아닌 역할극 형태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카피하다>가 원본 이상의 가치를 갖는 복제품에 대한 영화라는 것, 그리고 복제품에 대한 반응을 통해 그것이 모방한 현실로까지 그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려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이 역할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짧은 여정이 시작되는 차 안에서 제임스는 평범한 물건을 박물관에 갖다놓는다면 이는 대상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이라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키아로스타미는 예술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던 이 작품 속에 부부 관계라고 하는 평범한 대상을 슬쩍 얹어놓는다. 즉 키아로스타미는 진품과 위작, 원본과 복제에 대한 논의의 틀 안에서 부부 관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평범한 대상이 특별한 대상으로 변모하는 마술을 부리고, 이를 통해 관객의 반응을 일으키려 한다. 실제로 제임스와 여인은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라면 다툴 만한 것들로 다툰다. 만약 그것이 역할극(부부 관계의 모방)이라는 필터를 경유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들의 대화에 그만큼 귀기울일 수 있었을까? 키아로스타미가 보기에, 모방은 원본에 대한 수동적 기록이 아니며 원본을 탁월하게 만들거나 원본보다 더 탁월해지는 생산적 마술에 가깝다. 이러한 복제의 마술이야말로 키아로스타미가 바라보는 삶과 예술의 관계이자, 원본(현실)보다 복제품(예술)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다. 더 나아간다면 <사랑을 카피하다>의 이러한 태도는 여러 작품을 혼종모방(특히 <이탈리아 여행>)하며 완성된 자신에 대한 변호이자, 그 자체가 혼종적 복제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한계를 바로 복제를 통해서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의 모방

여인이 예술의 가치는 작품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보는 입장에 가깝다면 제임스는 관람자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두 사람의 예술에 대한 관점 차이, 또는 원본과 복제품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여성과 남성간의 필연적 간극으로 전치시킴으로써 역할극에 좀더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제임스와 여인을 보편적인 남성(남편)과 여성(부인)의 형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그들이 대화를 통해 함께 겪은 것처럼 가장한 사건들은 그들 각자의 실제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인은 어제 결혼기념일을 맞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남자는 자신의 부인이 졸음운전하는 차를 탄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이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그들 대화의 모든 내용이 모방의 연쇄인 역할극 속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 허구의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진실한 감정과 삶의 보편적인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다(역사서술과 달리 픽션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모방이 아닌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의 모방을 지향하는 법이다).

여인이 과거의 흔적으로 가득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가 바라는 진정한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시간에 놓여 있다. 제임스가 진품과 위작이 뒤섞여 있는 여인의 가게를 찾았을 때, 제임스와 대화하는 여인의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치면서 미장센된 골동품의 일부처럼 제시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녀에게 현재의 시간은 일밖에 모르는 남편과 자신을 괴롭히기 일쑤인 아들로 엉망진창이다. 그녀에게 현재의 시간은 모방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녀가 제임스를 안내하며 과거의 시간을 향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물관, 자신이 결혼했던 장소, 그리고 결혼 첫날밤 묵었던 모텔에 이르기까지, 역할극에서 그녀는 과거의 시간을 되살려내려 한다. 하지만 제임스에게 과거의 시간은 모방이 아닌 거리두기의 대상이다(그는 골동품 가게에서 여인에게 이에 대해 충고하기도 한다). 제임스는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변화를 잉태하는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려 한다. 제임스와 여인의 역할극은 이러한 간극, 즉 과거의 지속을 꿈꾸는 여성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를 인정하는 남성간의 어긋남을 모방한다.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두 사람의 대화장면(특히 레스토랑의 대화장면)은 숏과 리버스 숏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모든 숏이 상대 인물의 역할극 연기에 대한 반응(리버스 숏)인 듯한 느낌을 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관객이 확인하게 되는 것(또는 반응하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응에 대한 반응’ 속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간극이다. 여인은 과거의 시간을, 제임스는 현재의 시간을, 키아로스타미는 그들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모방한다. 마치 제임스가 거리를 두고 걷는 여인과 아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듯이 말이다.

키아로스타미가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서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한다 해도, 예술관에 있어서는 제임스에게, 정서적으로는 여인쪽에 좀더 이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가 원본과 복제간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규정하는 반면, 여인은 모방의 행위에 있어 절실한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기막힌 복제품>이라는 저서까지 낸 제임스보다 진품에 가치를 부여하던 여인이 복제의 행위에 더 적극적이라는 것은 뭔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한 시도가 복제품이 원본을 넘어 아름다움의 영역까지 비등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남자의 연기에 반응하며 소생시키려는 대상은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그녀에게 복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원본은 과거의 그 시절이고 그녀는 이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혼식을 올린 장소, 행복에 겨운 신랑, 신부의 미소, 모텔 객실과 창밖의 풍경, 그리고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는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다(신혼부부, 중년부부, 노년부부가 연이어 등장하며 지속되는 사랑까지). 그렇게 현재의 시간에도 여전히 지속하는 과거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오직 남편만이 변화했고 자신의 행복만이 사라졌다. 복제에 대한 욕망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다름 아닌 원본을 향한 열망이다. 특히 모텔 앞 계단에서 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신에서 그 시절(원본)을 되살리려는 그녀의 시도는 애잔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답다. 우리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데 있어 그들의 관계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사랑을 카피하다>가 원본과 복제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었던 힘은 단지 두 사람의 관계를 혼돈하게 하는 서사적 장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분 자체가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관객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우리는 여인의 마지막 연기에 대한 그의 마지막 반응을 본다. 거울을 바라보며 들려오는 종소리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단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제임스 자신이 공동 연출하고 주연한 이 ‘기막힌 모방’ 앞에서, 그 안에 머물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빠져나오기로 결심한 듯한 느낌을 준다(이는 제시된 구도 안으로 출현하며 영화를 시작했던 것과 쌍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는 지금까지 펼쳐 있던 자신의 책을 덮는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어긋나 있는 셈이다.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 제임스 뒤편에 보이는 세상에는 무심하게 종소리만 울려퍼진다. 아마도 그 세계를 향한 여인의 모방은 지속될 것이고,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도 그럴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극은 비극일 수 있다 해도, (원본과 복제 사이의) 이러한 간극이야말로 원본을 향한 복제의 꿈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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