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는 술을 좋아한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모비딕>의 기자시사회와 VIP시사회가 있었던 5월31일 밤에도 김민희는 스탭들과 새벽까지 뒤풀이를 했다. “끝까지 남았어요. 많은 사람들과 촬영할 때 있었던 이야기하면서.” 주연여배우가 술자리의 마지막까지 남는 행동에 대해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배우가 자신의 결과물에 불만스럽지 않은 것 하나는 확실하다.
당돌하거나 혹은 엉뚱하거나. <모비딕>에서 김민희가 연기한 성효관을 한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성효관은 공대생 출신의 기자로, 선배기자인 이방우(황정민), 손진기(김상호)를 도와 의문의 ‘발암교 폭발사건’을 취재한다. 선배기자들 사이에서 제법 당돌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 이는 전작에서 김민희가 보여준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모비딕>의 박인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김민희를 염두에 둔 이미지이기도 하다. 김민희의 전작을 한번 나열해보자. 김민희는 <여배우들>(2009)에서는 드센 선배 여배우들 사이에서 튀진 않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 여배우를 연기했고, <뜨거운 것이 좋아>(2007)에서는 허구한 날 집에서 조카에게 구박받다가 집 밖에 나가면 항상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는 엉뚱한 시나리오작가 ‘아미’를 표현했다. 물론 사랑을 찾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드라마 <굿바이 솔로>(2006)의 ‘미리’는 잠깐 옆으로 밀어놓자.
연기 하는 즐거움 알려준 조연
다만 전작과의 차이라면 이번에는 김민희가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이 아니라 주연배우를 돕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내가 주역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뜨거운 것이 좋아> 할 때는 주변 인물들이 저를 따라오는 역할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잖아요. 농구로 비유하자면 어시스트를 하는 건데, 내가 이런 연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연기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신 스틸러’(Scene Stealer)가 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어떤 조연배우들처럼 김민희 역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까. “어쨌든 성효관은 이방우를 돕는 인물이잖아요. 촬영장에서 튀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그런 욕심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현장은 정말 의논을 많이 하는 분위기였어요. 같이 돕는다는 얘기도 많이 했고. <여배우들> 할 때도 그랬어요. 선배들한테 묻혀가야겠다고.” 그래서일까, 극중 성효관은 사건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내맡기고 황정민, 김상호 두 남자배우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사실 <여배우들> 이후 김민희에게 러브콜을 보낸 시나리오는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그가 돋보일 수 있는 시나리오도 몇 있었다. 그럼에도 김민희는 물리적인 비중이 훨씬 작은 <모비딕>의 성효관을 골랐다.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어요. 성효관의 비중이 크거나 그렇게 튀는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그때 먼저 캐스팅된 황정민, 김상호 선배도 너무 좋았고요.”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좋은 작품이라는 전제하에서 유효하다는 말이다.
<모비딕> 현장은 촬영 전 취재를 통해 구축한 기자라는 기본 뼈대에 김민희의 색을 입히는 작업이었다. 김민희는 시나리오에 살을 붙이는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냈다. 지금과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면 한참 다른,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94년 당시 의상을 위해 자신의 옷장을 열기도 했다. “1990년대 의상은 컨셉 잡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새옷으로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감독님, 촬영감독님을 비롯해 10명이 넘는 스탭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예전에 입던 옷을 직접 보여드렸어요.” 극중 민간 사찰을 하는 정부의 비밀 공간에 잠입해 술 취해 소변보려는 시늉을 하면서 휴지통에 숨겨둔 녹음기를 꺼내는 장면 역시 김민희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소변이 아닌 오바이트를 하는 설정이었다. “술 취하고 오바이트를 하는 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했어요. 휴지통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휴지통을 변기의 일부라 생각하고 볼일보는 설정으로 해봤어요. 그게 훨씬 더 성효관스럽고 똘끼가 느껴지고 논리적으로 설명도 가능하고. 사실 스타킹까지 내리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롤러코스터처럼 강한 쾌감을 만끽하게 해준 신이 있었다면 힘들었던 순간도 있다. 겨울만 되면 감기를 달고 사는 체질 탓이었다. “겨울에 추위를 많이 타요. 촬영 회차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도 항상 감기 걸렸을 때 촬영날이 잡혔어요.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라 생각했어요. 얼굴 상태가 안 좋은 게 취재 때문에 피곤한 성효관에게 플러스가 되기 때문이에요.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와 있고 얼굴도 부어 있는 등 그런 모습들이 스크린에 나오니까 정말 하늘에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건 분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요. 제 모습이 이상해질수록 너무 좋았어요. (웃음)”
이렇게 치열하게 캐릭터를 만들어가도 대중은 여전히 김민희라는 이름 옆에 배우보다 패셔니스타라는 수식어를 두길 좋아하는 듯하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김민희를 치면 자동으로 패셔니스타가 함께 뜨는 것이 그 증거다. ‘패셔니스타’라는 말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연기를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김민희라는 배우에게 ‘패셔니스타’는 그가 가진 수많은 특징 중 하나인데, 유독 그것만 강조하는 건 배우에게 다소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김민희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배우든 패셔니스타든 대중이, 감독들이 나를 생각해준다는 건 사랑받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나만 사랑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여전히 배우보다 패셔니스타로 생각하시는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다른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그건 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점에서 <모비딕>은 ‘배우 김민희’에게 어떤 의미의 작품일까. “새롭게 출발하는 작품 같아요. 내가 다른 유형의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주역이 아닌) 연기하는 재미도 찾았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이 더 떨려요.”
차기작 <화차>에서 또 다른 변신을
1년에 1편, 많으면 2편. 그간 신중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김민희는 올해부터 속도를 더 내려고 한다. 그의 다음 선택은 이선균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변영주 감독의 <화차>(가제).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화차>는 신용카드, 대출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멸해가는 인간을 그리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화는 소설과 많이 달라요. 제가 맡은 주인공 여성은 선과 악이 뒤섞인 인물로 감정의 밑바닥에서 최고점까지 온몸으로 보여야 하는 캐릭터예요. 어떻게 접근하고 만들어가야 할지 정말 고민이 많아요.”
김민희는 올해 서른이 됐다. 외모가 워낙 동안인 까닭에 그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글쎄요. 서른이 됐다고 달라지는 것보다 터닝 포인트라는 게 인생에서 한번씩 찾아오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생각이 정리되는 시점이 있잖아요. 그때마다 연기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요. 중요한 건 중심은 항상 지켜야 한다는 거예요. 그 안에서 버릴 건 버리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죠.” <모비딕> <화차>를 통해 김민희는 연기의 또 다른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그를 계속 지켜봐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