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영화는 마술적 환영을 자아내는 도구였다. 영화의 사실성을 사진이 담당하였다면 움직임은 그 자체로 스크린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이었다. 라틴어로 ‘살아 움직이게 하다’라는 애니메이션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어쩌면 애니메이션이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표현수단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적’이라는 말은 진짜 같아야 한다는, 그러나 결코 진짜가 아님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진짜냐 아니냐의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에 도리어 진정한 현실로 도약할 수 있다. 프랑스로부터 날아온 걸작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는 세월에 잊혀져가는 한 마법사의 이야기를 통해 현란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영화의 진정한 마법을 일깨운다.
세월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나이 든 마술사 ‘타티셰프’는 무대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돈다. 자신을 찾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마술사는 파리의 극장을 전전하다 영국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역시 록스타에게 밀려 찬밥신세다. 우연히 얻은 명함 한장에 의지해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 마을까지 찾아간 마술사는 그곳에서 자신의 마술을 진짜 마법이라 믿는 앨리스라는 시골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사준 구두 한 컬레의 인연으로 무작정 마술사를 따라나선 소녀를 마술사는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내키지 않는 일까지 해가며 소녀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마술사와 도시의 화려함에 점점 동화되어가는 시골 소녀의 모습이 파스텔톤의 동화 같은 풍경과 함께 스크린 위로 아름답고 쓸쓸하게 펼쳐진다.
<일루셔니스트>는 여러모로 그리움을 자극하는 영화다. 자크 타티가 딸에게 보낸 편지를 원작으로 해 출발한 이 영화는 <벨빌의 세 쌍둥이>에서부터 오랫동안 그를 오마주해온 실뱅 쇼메 감독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영화의 정서는 조용하고 깊고 우아하다. 섬세하게 재현된 에든버러의 풍광을 보다보면 고전영화에 대한 향수는 물론이거니와 클로즈업 하나없는 정적인 화면으로도 얼마나 깊고 우아한 영상미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리는 명배우이자 위대한 감독인 자크 타티를 되살려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마법을 발휘한다.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 레인코트와 우산, 담배까지 자크 타티의 대표 캐릭터 ‘윌로씨’ 그대로. 극중 우연히 극장으로 들어간 그가 안에서 상영되고 있는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를 보는 장면은 판타지와 실사가 어우러진 진짜 환상에 다름 아니다. 광대, 마술사, 복화술사 등 잊혀져가는 것들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일루셔니스트>는 함부로 설명하거나 위로하려 들지 않는 움직임의 우아함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타티셰프’의 말처럼 마술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남겨준 환영은 어느새 관객 마음속 깊이 자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