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여전히 잘 놀 줄 아는군
2011-06-23
글 : 김태훈 (영화평론가)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가 곡사표 영화로서 가지고 있는 특징에 관해

김곡, 김선 쌍둥이 감독은 여전히 잘 놀고 있다. 여기서 논다는 단어는 비판의 단어가 아니다(유희라는 단어 대신 논다는 단어를 쓴 것은 판놀음과 ‘놀이’의 개념이 더 잘 맞는다는 판단에서다). 감독이 판을 제대로 벌일 줄 알고 그 판에 들어가 제대로 놀 줄 아는 것은 감독의 재능이고 또한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감독이 잘 놀지 못하면 배우도 힘들어지고 스탭도 힘들어진다. 제대로 정말 잘 놀 줄 아는 감독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김곡, 김선(이하 곡사)은 많지 않은 그들 중 하나이다. 곡사가 쉼없이 이어온 그들의 놀이는 한국영화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며 현재 한국영화의 또 다른 현상이며 단면이다.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이하 <화이트>)는 곡사표 영화가 맞다. 그들은 여전히 말할 것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놀 것도 많다. 아이돌과 왕따라는 사회적 현상을 끌고 오고 여전히 이미지와 영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충무로의 자본으로 만든 첫 상업장편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였다. 이야기의 흐름은 자주 끊기고 사건들 사이의 개연성도 많이 떨어진다. 심지어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관객은 쉽게 파악하기 힘들다. 미스터리의 구조를 띠고 있고 그 원인을 관객과 함께 찾아나가는 것이 이러한 영화의 서사 구조라면 관객이 같이 따라가면서 호흡하고 즐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서사의 반전이자 열쇠를 쥐고 있는 백댄서의 이야기는 지극히 제한된 정보와 화법으로 명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며 그 열쇠를 찾아가는 인물들의 추적 과정에서도 관객은 소외된다. 등장인물들은 실마리를 찾았다고 환호하는데 그걸 보는 관객은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 식이다.

묘사만 있고 서사는 없는

이러한 화법의 문제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난다. 서스펜스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정보와 관객이 알고 있는 정보 사이에서 서술자가 화법으로 유희하는 것이라면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없고 순간순간의 놀라움만 있다. 관객의 기대는 지연되거나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놀라움만으로는 관객이 같이 즐기고 놀기에는 한계가 있다.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에서는 감독의 재능도 보이고 그들 나름의 소기의 목적도 달성한다. 꽤 충격적이지만 감독 혼자 즐기고 논다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들쭉날쭉 튄다. 순예 역을 맡은 황우슬혜의 불분명한 대사는 계속 귀에 거슬리며 몰입을 방해한다. <미쓰 홍당무>에선 그렇지 않았다. 어눌한 것 같은 말투가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져서 매혹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또한 그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핑크돌즈 네 배우들의 감정선도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함은정은 끼있고 재능있는 대표적인 연기돌이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이 십분 발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배우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의 문제다. 영화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감독의 의도와 영화적 완성도는 구분되어야 한다.

곡사는 인터뷰(<씨네21> 807호)에서 앞서 언급한 서사의 문제에 대한 질문에 “그런 게 흥미롭지 않나? 묘사가 없고 서사만 있는 희한한 경우라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거다. 만약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올드한 것일 수 있다는 거다. 우리는 서사의 불친절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돌 뮤직비디오의 속도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만약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영화적 완성도를 더 높여야 했다. 관객과 같이 놀지 못하고 감독 혼자 놀고 나서 “이게 더 재밌지 않냐? 너희들이 따라와”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언이고 자신들의 의도와 놀이만 생각할 뿐 영화적 완성도와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발언이다. 곡사만의 다른 영화를 기대했는데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이 대사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네, 카메라와 화면 연출이 상투적이네 등의 이런 기대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얘기하듯이 표피적으로 상투적인 방식을 고집하든, 어떤 연출 방식으로 밀어붙이든 어떤 식으로 판을 벌이고 노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고 권리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소격효과라기보다는 연출 부족이다. 찍어놓고 편집에서 서사의 흐름을 빠뜨렸다면 편집의 문제이고 안 찍었다면 시나리오의 문제이다. 캐릭터를 못 끌어냈다면 연기 연출 부족이고 캐릭터가 안 맞았다면 캐스팅을 잘못한 거다. 관객과 같이 놀지 못하고 정서를 못 끌어냈다면 상업장르영화에 도전한 감독의 능력 부족이다. 판을 벌여서 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맞는 판을 제대로 벌이는 것이 중요하고 거기에서 잘 놀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맞지 않는 신을 신고는 외출할 수도 없고 놀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새 신을 신었고 곧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드러날 것이다. <화이트>는 곡사표 영화이며 그들이 추구해왔던 화두와 문제의식이 여전히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영화는 왜곡된 이미지로 시작해서 현란한 이미지의 폭발로 끝난다. 곡사는 꾸준히 매체와 이미지에 대한 실험를 해왔다. 김곡은 남다은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점점 더 이미지란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점점 내 작업이 빛과 시선을 삼켜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뭔가 빨려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나는 몸의 가장 핵심인 뇌를 건드리고 싶다. 내가 원하는 건 영화가 물질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 재현의 간극을 없애는 데 관심이 있다.” 이에 남다은 평론가는 “보이는 것 그 자체로 말을 거는 영화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머리 말고 몸으로 느끼는 영화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영화 후반 플리커 페이스로 대변되는 이미지의 폭발은 감독의 인터뷰를 연상하게 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몇해 전 전주영화제에서 봤던 피터 체르카스키의 <Outer Space>와 <Dream Work>를 떠올렸다. 당시 내 시야에는 강렬한 빛과 어둠의 반복, 온통 그것뿐이었다. 나의 머리는 정지했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 심장으로 보고 들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전율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상쾌한 잠을 자고 깬 기분으로 극장을 나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곡사의 놀이는 주효했고 그들이 시도한 촉지각적 이미지는 또 다른 시금석이 되었다. 곡사의 인장은 플리커 페이스뿐만 아니라 영화 전편에 깔려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내재성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놀이로 마네킹, 마리오네트, 박제, 껍데기, 짐승 등의 화두를 던져왔던 곡사는 이번엔 아이돌을 끌고 온다. 여기가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분열이 재미있다는 그들의 말처럼 티아라의 함은정은 핑크돌즈의 은주로, 은주는 다시 그녀가 발견하는 15년 전의 아이돌 그룹의 리더로, 다시 백댄서로 끝이 없는 미장아빔(mise-en abyme: 작품 전체 구조와 주제를 반영해내는 장면) 구조로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고 오염시키며 균열을 내고 심연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인간이 아닌 마네킹, 마리오네트, 박제의 반인간적 이미지는 얼굴에다 표백제를 붓고 산업폐기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 얼굴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인간은 머리가 아닌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굴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며 그 얼굴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내재성의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에 대한 거부이며 그 시스템에 대한 공격이다. 영화에서 핑크돌즈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눈알이 튀어나오고 얼굴이 뭉개지며 공포는 그러한 얼굴에서 비롯된다. 매체와 이미지에 대한 곡사의 놀이는 반복되는 비디오 화면과 음악에서도 나타나며 15년 전 비디오 화면에서도 여전히 얼굴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고 가려져 있다. 볼 수 없는 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고 반복되는 비디오 화면은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왜 이 세상은 짐승 같을까”

곡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왜 이 세상은 짐승 같을까에서 시작해서 그렇다면 짐승, 마리오네트들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견디고 있는 주체를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로 나아간다. 이 존재들이 박제화의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 껍데기만을 가지고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적을 역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그게 현재의 주체다.” 곡사는 자신들의 믿음을 줄기차게 그리고 치열하게 추구해왔다. 그들은 판을 벌이고 놀 줄 알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판을 벌이든 그들은 계속 놀이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놀이를 우리는 궁금해할 것이며 지치지 않는 그들에 열정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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