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홍진의 <굿바이 보이>는 2000년 이후 한국영화계에 빈발해온 회상체 향수영화의 계열로 묶을 수 있는 작품이다. <친구>(2001), <품행제로>(2002), <말죽거리 잔혹사>(2004), <스카우트>(2007), 근작 <써니>(2011)에 이르는 노스탤지어영화의 계보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이들과 <굿바이 보이>가 갈라서는 지점은 과거에 대한 서술이 지나간 기억을 환기하는 차원의 재현을 넘어 시대 또는 역사성의 인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품행제로> <말죽거리 잔혹사>를 통해 시대의 정황이 과거 향수의 태도를 좌우하는 인자가 된 적이 있지만 이 영화만큼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던 듯싶다. <굿바이 보이>의 인유의 수사가 왜 흥미로운가 하면 80년대를 무대로 삼아 수난의 가족사와 질곡의 시대사를 나란히 세워놓고 둘의 상관관계를 유추하도록 만드는 서사 구조를 통해 범상한 노스탤지어영화의 틀을 벗어나려 한 지점에서 발견되는 논쟁적인 형상화 방식 때문이다. 말하자면 <굿바이 보이>에서 주인공 진우(연준석)의 회상조 내레이션에 깃든 어조를 요약하면 ‘아프게 추억하는 그리운 시절’쯤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시절을 아파한다는 건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뜻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지난 연대에 대한 쓸쓸한 회오(悔悟)를 앞세우는 영화 안에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비전이 동시에 끓고 있다. 아프지만 동시에 그리운 시절이라고 하는 이율배반적 태도가 영화 안에도 스며 있고 그것이 80년대를 회고하는 이 성장영화를 바라보는 입장을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가족과 국가의 폭력
<굿바이 보이>는 시대의 질곡상을 개인사 위에 포개놓으려는 작의 위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회사적인 시각에서 ‘야만과 폭압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80년대를 통과하는 한 소년의 성장기 형태로 기술되는 영화의 서사는 10대 주인공 진우의 식구들과 주변인들 각자가 시달려온 모종의 폭력성을 다방면으로 재현시키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폭력적인 시대상에 대한 재현은 진우와 함께 사는 식구들(키우던 개 ‘밍키’와 뒷방 누나 은영, 친구 창근까지 포함)의 특수한 경험들과 뒤섞이고, 그리하여 각 인물의 스토리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집약적인 삶의 형태로 상징화된다. 폭력의 시대와 근거리에 또는 중심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 인물들 각자가 통과하는 체험이 시대의 어떤 면을 상징하기 위해 취해진 것인지 알기 위해서 조금 더 면밀하게 저들의 스토리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진우의 가족 안에서 80년대의 질곡상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은 아버지 경식(안내상)이다. 근년간 폭력과 무능의 소여로 아버지를 묘사하는 영화들(<천하장사 마돈나>(2006), <똥파리>(2008), <아버지는 개다>(2010))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부계의 전통이 완고한 한국사회에서 상징적 아버지들의 전횡이 심각했음을 입증한다 하겠다. <굿바이 보이>는 한국영화에 살부의식과 부계 전통이 노정한 질곡의 역사를 국가적 전횡의 시대와 마주보게 만들면서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그것을 확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아버지는 이 영화에서 시대적 모순의 집약체이며, 가장 흥미롭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인물 역시 이 아버지이다. 사사건건 분란의 씨앗이 되는 문제 행동을 일삼는 아버지는 민정당 지지자에 방첩대 활동을 한 전력이 있는 골수 보수인데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도박꾼으로 설정되어 있다. 생활의 치열함과는 거리가 먼 한량적 기질의 이 사내는 한편으로 멋들어진 노랫가락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로맨티스트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고 죽기 직전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슬쩍 내비치기도 하는 휴머니스트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일종의 미스터리인데, 단일한 성격화를 허락하지 않고 일방적 증오보다 연민이나 동정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진우의 주변인으로 가장 폭력과 가까이 있는 인물은 친구 창근(김동영)이다. 어찌 보면 창근은 아버지보다 시대의 폭력성을 극렬하게 체험하는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냉정한 세계의 이치를 일찍 깨달은 창근은 신문보급소장(김학선)과 동네 양아치 추종용으로부터 참혹하리만치 심한 폭행을 당한다. 더불어 창근은 신문보급소장의 뭇매에도, 추종용의 살기등등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거의 유일하게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진우의 또 다른 아버지 또는 멘토이다. 폭력과 연결되는 또 다른 인물은 은영(이채은)이다. 은영은 진우의 주변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야만적 시스템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네트워킹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진우네 뒷방에 세 들어 사는 운동권 대학생 은영은 비현실적이리만치 이상화된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아버지의 무능을 질책하는 목소리로 등장했던 그녀는 종래에는 무자비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의 제물이 된다. 사복경찰에 은영이 살해당하는 이미지는 영화 전역에 걸쳐 작동하는 폭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구두점으로 작용한다.
80년대의 추상화
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굿바이 보이>에서 작중인물들이 감내하고 때로는 저항하고자 했던 폭력은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한국사회의 모순과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무능과 가족 내에서 그가 보여주는 폭력성은 남한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왜곡된 시대인식의 산물이다. 출신성분이나 자라온 환경이 기득권 세력에 편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을 추종하는 맹목적 반공주의자인 아버지는 권세의 심부로부터 밀려난 잉여인간이다. 가족의 결손으로 일찌감치 ‘정글’로 내몰린 창근과 운동권 학생 은영은 순응을 거부하는 꼿꼿함으로 시스템에 맞서다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이들에 비해 어머니 문정(김소희)은 중용을 택한다. 거창한 삶의 목표나 이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그녀는 시대의 고통과 질곡을 묵묵히 견디며 생활인의 길을 간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을 건사하는 데 생애를 바치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에 가깝다.
80년대를 묘사하는 이런 형상화 전략에 대한 동의 여부는 폭압적 철권통치의 시대를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전략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폭력에 대한 형상화는 직설적이기보다 우회적이며 그 역할을 떠맡은 이는 신문보급소장과 추종용, 그리고 희미하게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이런 시대적 정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시각으로 그를 봐야 할 것인지 조금 애매해진다. 아버지는 무능하지만 권위적이거나 폭력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외려 매번 선거 때만 되면 구청장을 꿈꾸는 허황된 소망이 험준한 권세의 진입장벽 앞에 좌절되는 인물이며, 권력의 메커니즘에 속박당한 희생양에 가깝다. 아버지는 또한 가족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인물인데 반해 80년을 지배한 핵심 모순으로부터 한발 비껴나 있다. 가족들에게 폐만 되는 가장이지만 그렇다고 제왕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폭군은 아니며 그저 무능할 뿐이다. 키우던 개를 잡아먹음으로써 진우에게 트라우마를 안겼을 때부터 아버지와 개는 유비관계로 묶인다. 살갑게 지내던 가족 같은 친구였지만 천박하고 야만적이었던 폭력의 시대를 투영한 ‘개’의 이미지처럼 아버지는 여기서 중의적인 뉘앙스를 떠안는다. 무능하고 뻔뻔하고 제멋대로지만 인간적으로는 동정의 여지가 많은 존재. 이 지점에서 한 가정을 궁지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무능과 실기에 대한 분노는 발생과 동시에 소멸해버리고 만다.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적으로 폭압의 시대를 인유하는 사람은 신문보급소장이다. 야구 선수 박철순의 사인이 담긴 이만수의 야구 방망이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그가 어느 날 창근을 그 야구 방망이로 흠씬 팼던 것과 같은 모양으로 진우의 볼기짝을 두들길 때, 최루탄 자욱한 골목길에서 개처럼 은영을 끌고 가던 사복경찰이 그의 모습 위로 오버랩된다. 약자 앞에 군림하려 들고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센 저항이 돌아올 때는 슬쩍 꼬리를 내리는 신문보급소장의 얼굴에는 시대의 졸렬함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주먹질 하나로 동네 안에서 왕 행세를 하는 추종용도 같은 맥락에 놓을 수 있다. 여자친구 수진을 두고 창근과 기싸움을 벌일 때, 근동에 자자한 자신의 악명에도 기가 꺾기지 않는 창근의 결기에 눌린 추종용은 용병 싸움꾼(?)을 대동해 창근을 짓밟는다. ‘독고다이’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창근과 달리 그들은 정면승부를 피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저항을 무력화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고 싶어진다. 80년대를 인유하는 형상화 방식에 있어 국가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을 연결하는 것은 온당한가? 개인의 역사를 침식한 공적 역사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어떤 구체적 묘사로부터 찾아질 수 있는가? 공권력의 익명의 폭력 위로 겹치는 신문보급소장의 얼굴은 한국사회가 아프게 앓고 지나간 80년대의 폭력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 두 가지 행위는 우리의 자유와 의지를 억압한 폭력으로서 같은 기원을 가지는가? 지난 시대의 상처에 강박된 세대의 자기 초상 너머로 어른거리는 시대의 폭력성과 이데올로기를 쟁점으로 삼은 <굿바이 보이>가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는지는 사실 모호하다.
상실의 연대기와 멜랑콜리
<굿바이 보이>에서 시대의 정황을 드러내는 것은 소년기의 ‘상실감’이다. 내러티브는 진우의 상실의 연대기로 볼 수 있는데, 그를 휩쓸고 간 시대의 폭력성과 인간의 나약함, 유년기에 겪는 상실, 정체성 찾기가 내적 형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소년기의 진우는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는다. 가장 먼저 개를 잃고, 뒷방 누이를 잃고, 아버지를 잃고, 친구 창근을 잃는다. 그들은 피붙이거나 함께 기거하는 가족(개) 또는 유사가족(은영, 창근)이다. 환언하면 <굿바이 보이>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의 탁류는 ‘가족의 상실’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상실이란 무엇인가? 상실은 일종의 정신병적 우울증인 ‘멜랑콜리’와 연결된다. 멜랑콜리는 자신이 소유한 적 없었던 대상에 대한 상실의 감정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어떻게 소유한 적이 없었던 것에 대한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에 따른 퇴행적 반응이 아니라 상실된 대상을 살아있게 만들고자 하는 주체의 정신작용이다.
멜랑콜리에 빠진 인간은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상실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무엇보다 상실의 순간에 그는 자신이 상실하는 것들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다! <굿바이 보이>를 보는 관객이 갖는 멜랑콜리한 정서의 기원은 이같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내게 이 영화는 80년대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추상화된 80년대적 정서에 대한 회복을 갈구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시대적 정황에 대한 맥락화를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다루는 내용은 미시적인 생활사이다. 개발독재 시대를 통과한 한국적 근대화의 부산물인 껍데기뿐인 권위를 부여잡고 있는 무능한 아버지와 억척스러운 생활인으로서의 어머니는 30~40대 세대들에게는 익숙한 부모의 이미지다. <굿바이 보이>는 일상과 생활을 육체로 삼아 압도적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소년기’와 사별하는 한 소년의 고통과 수난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근대의 기획 속에 파괴되고 억압되어온 삶의 원형질에 대한 그리움, 중심에서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권력의 희생제의에 의해 제물이 되고 만 것들에 대한 애가인 셈이다.
물론 시대에 대한 추상화된 정서의 환기만으로 충분히 볼 만한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굿바이 보이>는 비교적 준수하게 그걸 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인유로 동원된 상징체계가 주는 혼란은 그냥 넘기기 찜찜한 구석이 있다. 개와 아버지의 이미지에 내포된 양가성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뇌리를 맴돈다. 개의 죽음으로 시작된 영화는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를 통해, 행위나 얼굴, 신체적 제스처를 통해 개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아버지는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해온 가족사의 질곡 그 자체이다. 개와 아버지, 그들은 상실의 대상인 동시에 상실감을 유발한 원인 제공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가 진짜 상실한 것은 무엇인가? 진우의 상실과 그의 소년기를 바라보는 관객의 멜랑콜리에서 기원을 찾기는 난망하다. 모두에 지적한 대로 <굿바이 보이>는 지나간 연대에 대한 씁쓸한 기억과 그리움을 한몸에 담고 있다. 어느 시대이건 명암의 대비가 있게 마련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인정하기 전에, 이 영화가 혐오하는 대상과 그리워하는 대상이 명확히 구분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
<굿바이 보이>는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 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편력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우하고 쓰라렸던 소년기에 작별을 고하려는 80년대의 재현으로부터 구체적인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이다. 시대에 대한 회고는 언제나 감상적 되돌아보기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동시대 관객들이 갖게 되는 멜랑콜리는 상당부분 정서의 추상화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사의 세목을 재현하는데 들인 공력만큼이나 시대의 공기를 형상화하기 위한 작업에 들인 각고가 커 보이는 <굿바이 보이>가 지나간 연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지연하거나 암암리에 회피할 수 있는 후일담 영화들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