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고 싶은 예술하며 먹고살 순 없을까
2011-06-17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다큐 <뉴타운컬쳐파티>의 주요인물, 소설가 유채림과 자립음악가들의 이야기


Prologue

소설가의 투쟁, 음악가의 자립

도시는 모순의 공간이다. 창조와 파괴, 문명과 야만이 공존한다. 안정과 불안정, 균형과 불균형이 교차한다. 대한민국의 재개발 열풍, 아니 ‘막개발 광풍’은 도시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 한국의 뉴타운은 도시와 주민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 세워진다.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이듯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 국가 권력은 어물쩍 뒤로 물러서서 자본의 편을 든다. 법은 허점투성이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은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다. 자본의 논리는 도시를, 인간을 몽땅 집어삼켜버린다.

정용택 감독의 다큐멘터리 <뉴타운컬쳐파티>의 시작점이 된,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칼국숫집 두리반도 한때 폐허였다. 두리반 주인인 안종려·유채림 부부도 가진 걸 몽땅 빼앗겼다. 1년5개월이 넘는 점거 농성. 두리반은 현재 매주 시낭독회, 다큐멘터리 상영회, 인디밴드 공연이 열리는 공간이 됐다. 문인과 음악인과 영화인이 안종려·유채림 부부의 손을 맞잡으면서 폐허에 꽃이 피었다. 그런데 홍대를 주무대로 삼고 활동해온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삶이 철거민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왜? 무엇이?

<뉴타운컬쳐파티>는 두리반을 중심으로, 인디밴드들이 국내 최초의 음악가 생활협동조합인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드는 과정을 따라간다. 유채림 소설가를 비롯해 자립음악가들, 한받·단편선·밤섬해적단·박다함의 이야기를 1년 넘게 쫓는다. 그리고 지난 4월29일, 자립음악생산자조합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5월1일에는 201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기획된 ‘2011 뉴타운컬쳐파티 51+’ 공연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뉴타운컬쳐파티>는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다. 그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슬쩍 공개해본다.



유채림

작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단순하게는 생존문제고, 거기에 인간적인 모멸감”이 더해져 소설가 유채림씨와 그의 아내 안종려씨는 오늘도 두리반을 지킨다.

2005년 3월, 안종려씨는 네 식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주택청약예금을 해약하고 대출받은 돈을 보태 세를 얻어 두리반을 차렸다. 2007년 12월, 부부는 명도 소송장을 받는다. 인천공항행 경전철이 들어선다고, 두리반이 있는 동교동 167번지 일대가 지구단위계획 지역으로 묶였다는 소식. 2009년 12월24일, 용역들이 두리반의 집기를 모두 들어냈다. “이 일대 재개발 사업이 860억원짜리다. 그렇게 큰 덩어리 사업하는 놈들이 이렇게 좀스러워서 되겠는가. 상가 세입자들에게 보증금, 시설투자비용, 권리금 보상 얘기는 한마디 없이 이사비용 300만원을 주겠다니.” 시행사 한국토지신탁과 시공사 GS건설을 향한 말이다. 이튿날 부부는 철판으로 덧댄 두리반 문을 따고 들어가 점거 농성을 시작한다. “철거민으로 초긴장만 하고 있”을 무렵 후배 문인이 찾아와 ‘작가는 무엇으로 싸우냐’고 물었고, 소설을 쓰며 한국 기독교 장로회 총회 출판국에서 편집일을 했던 유채림씨는 휴직계를 내고 작가로서의 싸움에 돌입한다.

유채림씨는 두리반과 문화운동의 결합이 “자연스러웠다”고 말한다. 2010년 2월27일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두리반에서 공연이 열린다. “두리반에 오면 펑크내지 않고 공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음악가들 사이에 생겼고, 용역들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어떤 막을 쳐줬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두리반은 “투쟁을 문화운동으로 해왔다”. 그 힘은 생각보다 컸지만 아직까지 협상에 진전은 없다. 부부는 ‘두리반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면 그 한 귀퉁이에 가게를 마련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인근에 두리반이 다시 문 열 수 있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상을 꿈꾸지 않았다. 현실을 살고자 했다.” 부부는 현실을 살기 위해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단편선

인간은 인간답게, 음악가도 인간답게

단편선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토론회에서 음악의 무용론, 음악가의 무쓸모론을 늘어놓는다. 잉여 중의 잉여, 상잉여라고 아무렇지 않게 자학하고 자조한다. 통기타 하나 들고 클럽과 철거 현장을 줄기차게 오가는 그는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학창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정확히는 “시험”이 싫어서 눈 돌린 게 음악이었고 학생회 활동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학에서의 학점은 1점대. 토익시험은 쳐본 적도 없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에게 아버지는 “너한테 받을 건 졸업장밖에 안 남은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단다.

어른이 되어서 좋아하는 일‘만’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려면 대단한 인내심과 낙천성이 필요하다. 단편선은 시도한다. 1집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섯번이나 엎어졌”고 그래서 주위 사람에게 ‘네가 음반 낼 수 없다는 데 십만원 걸겠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공들인 ‘2011 뉴타운컬쳐파티 51+’ 공연이 악천후 속에서 예상보다 적은 관객을 동원한 채 적자로 끝이 났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싶은 공연을, 하고 싶었던 방식으로 해서 좋았으니까.”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음악가가 음악가답게, 음악가가 인간답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립음악생산자조합 일을 한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건 버티기”다. “성공보다 망하고 깨져도 10년, 20년을 버티는 게 훨씬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 자립음악가 단편선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오늘도 망했네’ 하고 한숨 쉬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보상받기 위해 꾸준히 우물을 팔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니까.



한받

개인의 자립을 넘어 가족의 자립을!

한받은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자립음악가’라 불렀다. 인디가 아닌 자립. 그는 아마츄어증폭기(한받은 2001~2008년까지 아마츄어증폭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의 4집 <<수성랜드>>를 생산부터 판매까지 혼자 도맡아하다가 자립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한받이 정의하는 자립은 “자본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자본 중심의 삶을 지양한 결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다. 음악생산자의 자립은 “라이브클럽과 레이블이라는 매개체를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지 않고 관객과 직접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상품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본다.

2010년 11월11일, G20 정상회의가 있던 날 한받은 아버지가 됐다. “개인의 자립뿐 아니라 가족의 자립까지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샘솟게 됐다.” ‘2011 뉴타운컬쳐파티 51+’엔 처음으로 아이와 아내가 공연장을 찾았다. “두리반이 단순히 농성장일 거라 생각하고 두리반에 오는 데 어려움을 느꼈던 아내는 그날 두리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환대에 따뜻함과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고맙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한받은 두리반을 통해 자립과 연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또 두리반을 생각하며 <너 저질 너넣고 넋놓고-돈만 아는 저질> <칼국수먹고싶다홍대앞두리반식당> 같은 “투쟁을 밑절미로 하지만 춤추면서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을 몇곡 만들었다. 한받이 두리반에서 <너 저질…>을 부를 때면 유채림 소설가가 후렴구인 ‘돈만 아는 저질’을 울분 섞인 목소리로 열창한다. 한받의 음악은 늘 황홀경을 선사한다.

이상과 김소월, 펫숍보이스와 강병철과 삼태기, 피에르 리샤르와 앤디 카우프만(의 탈을 쓴 짐 캐리)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한받은 ‘민중엔터테이너’를 꾼꾼다. “그만한 깜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그마한 음악가로 살고 싶다.” 그의 품은 깊고 넓다.



밤섬해적단

취직하고도 밴드할 수 있을까?

밤섬은 여의도 옆에 자리한 섬이다. 밤섬해적단은 ‘밤섬에서, 경제와 자본의 중심지인 여의도를 습격하자’는 뜻을 담은 밴드명이다. 권용만(드럼)과 장성건(보컬, 베이스)으로 이루어진 그라인드 코어 밴드. 2010년에 이들의 1집 ≪서울불바다≫가 발매됐다. <성경이 진리이듯이><이명박 욕하면 나도 무려 좌파> 등 1분 내외의 42곡이 1집에 담겨 있다. 그 누구도 밤섬해적단의 풍자와 조롱을 피해갈 수 없다.

유쾌한 이 음악가들도 악기를 내려놓으면 이 땅의 평범한 젊은이가 된다. 대학 휴학생인 두 사람은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한다. “사회학과 나오고, 뚱땅뚱땅 드럼치고, 말은 못하는데 누가 일자리 주겠나?”(권용만) 첫 번째 걱정이 취직이면 두 번째 걱정은 일자리를 구한 다음에도 밴드를 계속 할 수 있겠냐는 거다. 현실에서 음악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되지 않고, 음악을 하려면 취직해야 하고, 취직을 하고 나면 밴드 합주에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기에 하는 얘기다. 마침 5월2일, 장성건은 정용택 감독의 소개로 어느 회사에 첫 출근했다.

이들이 원하는 건 간단하다. 음악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것.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 하는 것. “일본만 해도 마이너 장르 음악하는 밴드들이 많다. 한국에는 이상할 정도로 소수 장르 신이 형성돼 있지 않다. ‘홍대 앞 인디밴드’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불린다. 시끄러운 음악이 판칠 수 있고, 이런 음악을 맘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밤섬해적단) 이들에게 ‘자립’은 필요가 아니라 ‘필수’다.



박다함

서울과 지역 음악 신의 관계 고민 중

박다함은 <뉴타운컬쳐파티>의 조연출이자 노이즈 음악 밴드 ‘불길한 저음’의 멤버이자 공연 기획자다. <뉴타운컬쳐파티>의 조연출로서 초반엔 영화인과 음악인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서서히 두리반에 상주하면서는 스스로에게 적지 않은 변화들이 생겼다. 우선 박다함은 2010년 여름, 가출을 감행한다. 재개발 투쟁 현장에 있는 박다함을 봤다는 친척들의 이야기가 부모님 귀에 들어갔고 “아버지가 대노했다”. 가출로 학교도 잠시 쉬었다. 그는 올해 다시 복학했고, 졸업까지 3학기 남았다.

두리반은 박다함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한데로 모을 수 있게 해준 공간”이기도 하다. 재개발 문제는 밴드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사안이었다. “재개발되면 집값이 오르는 것처럼 밴드 합주비도 계속해서 오른다. 클럽대관료도 오른다. 홍대 앞에서 밀려나는 음악가로서 재개발 문제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두리반이라는 공간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모였고 담론이 생겼다”. 그 결과물이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박다함은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의 일원으로서 서울과 지역 음악 신의 연결점 찾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인천에 있던 라이브클럽을 아직 기억한다. 그게 사라졌다. 얼마 전에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어 클럽에 갔는데 관객이 없더라.” 당장 보여줄 결과물은 없다. 해법도 없다. 그는 “자립은… 현재로선 미래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합원 개개인이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면 무언가 큰 그림을 그리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을 피력한다. 그 믿음이라면 이들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pilogue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기를 분명히 거부한다

(자립음악생산자조합 발기선언문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발기선언문을 통해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립음악생산자조합 발기선언문 (2011년 4월29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과연 그러했는지는 의문에 싸여 있다만- 음악하던 음악가들이 15년 동안 좆뺑이친 결과 이 지역 땅값과 건물값만 올라갔고 건물주와 땅주인만 더욱더 배부르게 되었다. 이건 음악가들의 의도가 아니다. 물론 외도도 아니다. 음악가들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나빠졌다. 유령의 차림으로 범람하는 ‘인디’ 속에서 정작 음악가들의 삶은 초라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오, 음악가들이여, 그대 아직 살아 있는가?”

우리 음악가들은 오늘 이곳에서 ‘자립’을 선언하고자 한다.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기를 분명히 거부하며, 아울러 자본, 곧 화폐를 중심에 둠으로써 잃어버렸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 음악소비자들과 음악생산자들간의 좀더 밀착한 끈끈한 사랑하는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 실천의 하나로서 음악가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구축하기로 뜻을 모은다.
또한 의지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자본의 구속력에 휘둘리지 않고 음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서로가 돕고자 한다.
이러한 움직임과 실천-운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 같은 작은 음악가들과 서민들의 생계터전의 공간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밀려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한다.

경쟁이 아닌 상생으로, 분열이 아닌 연대로, 의존이 아닌 자립으로. 우리는 ‘자립’을 지향하는 한 사람의 음악가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이로서 지난날 인디-유령 같은 허위의식을 떨쳐버리고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통하여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지역 음악 신과 지역사회를 건설하기를 다짐한다.
말로만 불평하던 시대와 클릭으로 불펌하던 시대는 이로써 쫑났다.
이제는 우리가 일어나 행동할 때이다. 빅자지, 세간의 우려와 달리 큰 자지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빅토리빅, 자립자, 땅지. 승리하는 자립의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승리를 위해 나아가자!

자립음악생산자조합 일동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