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여장을 한 남자배우라는 루머까지 떠돌았을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먹먹한 귀로 운동장을 달리던 육상부원 시은의 질주는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체육복 아래 가는 몸에서 유독 도드라진 어깨 골격과 우윳빛 대리석 같은 광대뼈가 그려낸 것은 미소년이되 미소년 아닌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데뷔작에서 서늘한 눈빛을 제 것으로 만든 이영진이 두 번째 영화를 고른 기준은 무조건 ‘여고괴담 정반대’였다. “보이시한 건 일단 제쳤어요.” 한 가지 얼굴로 굳어지는 게 가장 두려웠다는 이 루키 배우는, 그렇게 <아프리카>의 ‘진아’를 선택했다.
진아가 되기 위해 이영진은 훌쩍 나이를 먹어야 했다. 79에서 81년생, 고만고만한 나머지 배우들이 또래를 연기하는 반면 진아 역만 20대 중반으로 설정되어 있는데다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과거의 소유자이기도 하기 때문. 우연히 굴러들어온 권총 때문에 좌충우돌하는 네 여자들 사이에 지원(이요원 분)이 타고난 판단력과 대담함으로 리더 역할을 한다면, 진아는 세상살이에서 체득한 지혜로 멤버들을 다독이는 맏언니 격이다.
그늘진 인물 진아를 표현하기 위해 이영진은, 화면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보여줄까 고민하기 전에 그 이면의 어둠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절망과 증오, 복수심. 극단의 감정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의 고요한 암흑을 상상하고, 촬영 내내 말을 아끼는 대신 가슴에 그림자를 품고 다녔다. 구체적인 표현에서 감독과 의견차를 겪으며 정적이고 조용한 진아의 아우라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연출자는 아니니까” 30%쯤이나마 자기를 담아낸 것에, 수긍하고 만족한다.
<여고괴담…>부터 <아프리카>까지, 몇줄 안 되는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여성영화로 채워져왔다. 특별출연했던 <순애보>에서도 김민희의 레즈비언 여자친구로 등장했으니.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편했다’는 게 이영진의 자평이다. 극중 여자들 사이의 심리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나,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면에서나. 특히 <아프리카> 팀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는데, 엉뚱한 막내 조은지는 제일 친한 공효진이 아끼는 후배라 각별하단다. 슛 전에 혼자 오래 고민하는 자신과 달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본 다음 제 생각을 보태 깜찍하게 똑 떨어지는 연기를 해내는 은지를 보며, 저건 다음 영화 때 꼭 배워가야지 마음먹었다.
이영진의 2001년과 2002년을 물었다. 지난해는 그에게, ‘모험을 떠난 해’였단다. 별명 ‘둔녀’. 아무리 큰 패션쇼 무대에서도, 몇대의 카메라 앞에서도 떨어본 적 없는 덤덤한 그가 지난 한해를 바친 영화 개봉을 앞두고는 지금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새해 소망은, 정말 소박해요. ‘모델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고 ‘배우’ 이영진으로 불리는 것. 음…, 너무 큰 꿈인가?” 남자배우 상대역을 아직도 못해봤다고, 평범하지 않은 얼굴 때문에 정말 평범한 배역은 10년쯤 뒤에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투덜대는 스물셋 이영진의 미래는, <아프리카>에서 진아가 돌리는 타로카드 점괘처럼 아직은 모호하다. 아프리카를 거친 여행이 그녀를 또 어디로 데려가줄지는, 아마 새로운 한해가 말해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