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권이 형이나 희본씨나 중요한 조연을 하면서 궤도에 올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인터뷰에 앞서 <도약선생>의 윤성호 감독에게 박희본에 대해 물었다. 윤성호 감독은 “SM엔터테인먼트의 피”가 흐르는 배우라고 말했다. 박희본은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밀크 출신이다. “톱스타는 되지 못했지만 연예인으로서의 좋은 코스는 다 거친 거죠.” 윤성호 감독의 말처럼 박희본은 한마디로 연예인이었다. 지금은? 독립영화 배우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린다. 독립영화만 하는 배우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박희본은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다. 이제 곧 서른이 되는 박희본은 좀더 유연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인터뷰 직전 작은 자동차 사고가 있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인터뷰에 응했으니 확실히 유연해진 건 사실인 것 같다. 연예인 시절 까칠했던 그녀가 아닌 살갑고 당찬 배우 박희본을 만나보자.
박희본에게 윤성호 감독은 요술공주 밍키의 요술봉이다. 윤성호 감독과의 만남 이후 대중의 머릿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던 걸그룹 밀크의 리더 박희본은 배우 박희본으로 ‘뾰로롱’하고 변신했다. “어렸을 때 소녀들은 밍키의 요술봉을 하나씩 갖고 싶어 하잖아요. 요술봉으로 변신도 하고 새로운 것도 만들어내고. 윤성호 감독님은 참 신기한 사람 같아요. 밍키의 요술봉이 신기하잖아요.”
윤성호 감독의 <도약선생>에서 박희본은 자신의 본명 재영으로 출연해 장대높이뛰기를 하자고 꼬드기는 전영록 코치(박혁권)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수 할 거예요. 운동해서는 계급을 바꿀 수가 없어요.” 과연 박희본은 가수를 하면서 계급을 바꾸었을까. 길거리 캐스팅으로 특별한 오디션 없이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박희본은 걸그룹 밀크로 데뷔하기까지는 시련을 맛보지 못했다. “슈퍼주니어 같은 경우는 팀을 여러 번 다시 짜고 그랬는데 우리는 큰 굴곡 없이 데뷔했던 것 같아요. 데뷔를 해서도 악착같이 ‘1등 해야지’ 이런 게 없었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도 재밌고 방송을 하다 보니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19살부터 21살까지 큰 욕심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아요.” 너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일까 밀크의 한 멤버가 탈퇴하면서 팀은 자연스레 흩어졌다.
해체 이후 박희본에게 밀크는 감추고 싶은 꼬리표가 됐다. “걸그룹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이름을 박희본으로 바꿨어요. 가수 활동 끝나고 회사에서 드라마 오디션을 보냈는데 아무리 다르게 하고 가도 양 갈래 머리에 흰옷 입고 나온 밀크로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과 상의해서 이름을 바꿨죠.” 박희본이 이름까지 바꾸고 연기자 활동을 시작한 건 2005년쯤. 데뷔 초기에는 <레인보우 로망스> <빌리진 날 봐요> 같은 드라마에, 지난해에는 윤성호 감독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두근두근 영춘권> <도약선생>, 양윤호 감독의 <그랑프리>,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까지 출연했지만 여전히 박희본은 밀크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신기한 건 이 꼬리표는 떼려 하면 더 달라붙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아이돌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꼬리표가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이력은 밀크 활동,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는 사실이에요. 그게 싫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내가 왜 버려야 하나 싶어요. 어렸을 때는 누가 ‘가수 했었지’ 하면 속으로 ‘아, 왜~’ 이러고 감추려고 했어요. 그게 짐이었던 거죠. 요즘에는 ‘네, 맞아요’ 그래요.”
연기하면 행복해지더라구요
박희본이 윤성호 감독을 처음 만난 건 “주인공인 줄 알고” 출연한 윤 감독의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영상원 졸업작품 <졸업영화>(2007)를 통해서였다. 윤성호 감독은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준비하면서 “연예인 같은 배우가 필요해서” 박희본에게 다시 연락했다. ‘박희본’(구 박재영) 혹은 ‘박재영’(신 박희본)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 출연한 박희본은 연예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카페에서 홍어를 먹고 손님과 얘기하면서 살이 잡히는 배를 슬쩍 만지는 소탈한 카페 알바생을 연기했다. 박희본 자신과 가장 닮은 모습이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촬영하기 전에는 많은 좌절을 느끼고 그랬어요. 그래서 오히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부담없이 했어요. 책임감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자는 식으로요. 그때 연기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희본의 트위터 프로필에는 ‘괴력의 뜀틀마니아’, ‘영화잉여+연기얄개’라는 소개글과 함께 ‘행복해지기 시작한 신인 연기자’라는 항목이 있다. “<그랑프리> 때도 그랬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때도 그랬지만 저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없잖아요. <그랑프리> 때 여자 기수 이다솜으로 출연했는데 현장에 혼자 가면 ‘우리 배우님 오셨다’고 스탭들이 많이 챙겨줬어요. 양윤호 감독님도 잘한다고 칭찬해주시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시작으로 <그랑프리>까지 출연하면서 연기하면 행복해진다는 공식이 성립됐던 것 같아요.”
연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작품이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였고 <그랑프리>였다면 <도약선생>은 제목처럼 박희본의 도약을 위한 과도기에 놓인 작품이다. “아직은 알이에요. (웃음) 누가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부화할 것 같아요. 윤성호 감독님과 했을 때는 박희본보다는 박재영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고, <그랑프리>에서는 왈가닥 박희본을 보여줬어요. 너무너무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요. 스스로도 내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출연하고 싶은 영화는 <마셰티> 같은 B급영화예요.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같은 액션영화도 좋아하고요.” 윤성호 감독도 나름 스포츠영화인 <도약선생>에서 보여준 박희본의 연기를 평하면서 “액션영화에 출연하면 잘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단편 <두근두근 영춘권>에서 잠깐 액션의 맛을 봤지만 박희본이 지금 당장 본격 액션 연기를 선보일 기회는 없다.
사업가 박희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박희본은 케이블 채널 <패션N>의 <스타일 배틀 로얄 TOP CEO 시즌3>에 출연 중이다. 조금 의외인데 자신도 어색하다고 말한다. “아직 연기자로서 만들어놓은 이미지도 없는데 쇼핑몰하는 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어요.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연기 이상의 제 생활 안에서 열심히 사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요. 지난해에 6편의 영화에 참여했는데 주위 분들이 ‘너는 연기하면 진짜 잘될 것 같다’고 하시니까. (웃음) 사실 좀 저랑 안 맞는 게 많아요.” 박희본은 연상호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 목소리 출연했고 김창래, 소재영 감독의 <학생영화>의 촬영도 마쳤다. 두 작품은 올해 하반기 개봉예정이다.
“나는 윤성호 감독의 열성인자 페르소나”
박희본이 이렇게 열심히 달릴 수 있는 계기는 어쩌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촬영 바로 직전까지 박희본은 늑막염으로 병원에 있었다. 3개월 정도 입원했고 스스로 “다시 인스톨됐다”고 말할 정도로 병원에서의 경험은 남달랐다. 한달 반을 물만 마시고 링거 영양제로 버티면서 박희본은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정신적으로 방전돼 있다가 충전한 것 같아요. 그때 제가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다 보냈어요. 정말 미안하다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썻어요. 그때 사람이 됐습니다. (웃음)” 병실에서 바닥까지 추락했던 박희본을 건져올린 사람이 요술봉 윤성호 감독이다. 스스로 “윤성호의 열성인자 페르소나”라고 말하는 박희본은 윤성호 감독의 “유작까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분발하고 있다. 김태희 언니 정도의 수준이라는 말은 웃기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면 분명히 더 재밌지 않을까요. 서로 윈-윈하고 시너지 효과를 주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윤성호 감독님도 나중에 임수정처럼 돼서 영화 홍보를 따로 할 필요 없는 ‘임수정 나오는 영화’처럼 ‘박희본 나오는 영화’ 하자고 했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