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감독의 기존 영화들에선 랩과 비트박스가 대사 이상의 무언가로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번엔 짤막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갖가지 주석, “이러저러한 꿈을 꾸었다”라는 장치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의 신작 <도약선생>에서 사랑을 위해 장대높이뛰기에 도전하는 두 소녀와 수상쩍은 코치의 허허실실 트레이닝이 시종일관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인터뷰 내내 배우들과 스탭들, 그리고 카메오 출연을 마다하지 않은 자립음악가 한받과 <장례식의 멤버>의 백승빈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강조했다.
-<도약선생>은 어떻게 출발했나.
=아리랑국제방송과 문화체육관광부, 디앤디미디어에서 주관하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대구를 배경으로,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제작 협찬을 해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무성영화처럼 선수가 움직이고 뛰고 연습하고 헉헉거리는 과정으로만 스포츠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걱정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예산은 공중파 드라마 1회분 정도였는데, 최종적으로는 공중파 시트콤 1회분으로 깎였다. 60분짜리 영화를 못 찍을 예산은 아니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스포츠영화 컨셉은 포기해야 했다. 좀 아쉽지만 기존의 윤성호식 농담 따먹기를 한번 더 해야겠구나 싶었다.
-애초의 스포츠영화 컨셉은 전작들과 많이 다른 쪽이었나.
=레퍼런스로 생각했던 영화가 <룸바>였다. 실제 퍼포먼스 댄서들이 별 대사 없이 미니멀하고 독특한 상황만으로 끌어가는데, 스포츠영화도 ‘열혈물’ 범주에서 벗어나 트레이닝하는 과정만으로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부터 여자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웃음) 최윤희 선수와 임은지 선수는 사전 인터뷰를 했다. 그러고 나서 더더욱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체격도 너무 좋고 연습 과정 자체가 너무 고난이도여서 이걸 이 예산으로 재연하는 게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인공 원식 역에 남자배우를 캐스팅하려다가 여배우 나수윤으로 바꾸었다고 들었다.
=예산도 안 짜고 시나리오도 안 쓴 상태에서 일단 제작발표회부터 해야 한다고, 시놉시스 정도만이라도 알려달라는 말을 들었다. 마침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할 때여서 대충 주인공 이름을 ‘하라’로 정했고, 박혁권 코치가 하라에게 독특한 장대높이뛰기 트레이닝을 시킨다는 정도로만 얘길 했다. 그랬더니 ‘육상 유망주 하라와 박혁권 코치의 뜨거운 도전과 사랑’이라고 각색돼서 나오더라.(웃음) 그때부터 남자 코치와 여자 선수의 사랑은 절대 안 쓰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 번째로 남자주인공을 생각하긴 했었다. 같이 작업하자고 계속 얘기해오던 젊은 배우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마침 그때 마라톤 드라마에 캐스팅됐다. 이런저런 문제가 겹치면서 평소 궁금했던 여자배우를 캐스팅하자고 맘먹었다. 희본씨는 원래 캐스팅할 생각이었는데, 원식 역으로는 좀 갸우뚱했다. 원식의 오랜 여자친구 우정은 이우정 감독이 연기하는데, 희본씨와 이우정 감독이 나란히 서 있는 게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좀더 수세적으로 사귈 것 같은 사람이 누굴까, 하다가 나수윤씨를 떠올리게 됐다. 러브 스토리에 있어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젠더를 바꾸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원식을 연기하는 나수윤은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상명대쪽 단편영화에 자주 나오는 배우다. 긁적거리면서 상황 옆에서 서성거리는 역을 잘해서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도약선생> 촬영 1주일 전까지도 여전히 원식 역이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였다. 원식이는 키가 컸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수윤씨가 키가 컸던 게 기억나서 전화해봤다. 영국 여행 가는 경비를 모으려고 인사동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기에 우리 영화 딱 1주일 찍으면 아르바이트비에 준하는 개런티를 줄 수 있다고 꼬드겼다. 그랬더니 그날 바로 사표를 냈다. (웃음) 영화 속의 그 주눅 든 표정이 연기가 아니었다. 굉장히 센스있고 귀엽고 재밌는 친군데, 연기 전공자로서는 특이할 정도로 자기를 어필하는 걸 싫어하더라. 수윤씨의 그런 캐릭터를 원식에게 투영했다.
-전영록 코치 역의 박혁권과 재영 역의 박희본은 둘 다 운동 신경이 굉장히 좋아 보이더라.
=혁권이 형은 복싱을 3년 정도 해서 싸움도 잘한다. 요즘도 여기저기 사건 사고… 를 일으킬 뻔하다가 안 그러고. (웃음) 희본씨도 운동 신경이 좋다. ‘밀크’ 멤버로 활동할 때도 춤을 잘 췄는데, 확실히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SM기획사에서 트레이닝받은 게 7년은 가는 것 같다. <도약선생>을 찍을 땐 희본씨가 늑막염에서 회복되던 중이라 오히려 좀 못한 편이다. 육상, 무술, 액션 다 가능할 사람이다.
-제작기에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촬영 방식이 언급되더라.
=사실 오래전에 단편 찍을 때 하던 방식이다. 캠코더 하나 달랑 들고 비전문 연기자들과 즉흥적으로 찍던 것 말이다. 하지만 <은하해방전선> 이후로는 그렇게 찍기가 힘들어졌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도 즉흥처럼 보이지만 전부 대본대로 한 거다. <도약선생> 때 굳이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 말한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의욕이 좀 덜했던 것 같다. 일단 대략의 시놉시스만 짜고 대구에 내려갔다. 우정이와 원식이가 같이 살았다. 우정이가 남자에게 가버렸다. 슬픈 원식이는 전영록 코치를 만나 말도 안되는 장대높이뛰기 트레이닝을 받는다. 여기에 재영이가 여차저차 합류하여 갖가지 훈련을 한다. 문제는 이 ‘여차저차’, ‘갖가지’, ‘소동’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웃음) 전에 예능 콘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식이더라. 기승전결에 맞게 대본을 써놓긴 하지만 그대로 가질 않는다. 온갖 재밌는 일들을 패널이 알아서 벌이는 식이다. 배우들과 연출팀과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할지, 여차저차 이것저것 갖가지를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의논했다. 그래서 각본에도 총 7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상황만 던져놓고 배우들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오케이, 그 위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얹자, 그렇게 해결했다. 예능식의 자막을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너무 장난스러워질 것 같고. 일본 애니메이션 <아따맘마>처럼, “오늘의 미션! 마요네즈가 좋아 빰바밤” 식의 내레이션을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들으며 라디오 DJ가 BGM과 함께 코너명을 읽는다든지 옛날 <딱다구리> <톰과 제리> 같은 만화들의 오프닝을 생각했다. (웃음)
=아, 그런 것도 있었구나. 후시녹음할 땐 <아따맘마> <아즈망가 대왕>처럼 네컷짜리 만화를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들을 많이 봤다.
-(이 부분에 스포일러 있습니다) 전영록 코치가 굳이 고자라는 설정을 넣어야만 했을까! 고자가 아니라도 “드높은 유토피아에 오르가슴을 느낄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안타까웠다.
=아리랑TV에서 방영되는 영화이고 심지어 아랍권 TV에도 방영된다. 이성애라도 센 장면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고자, 성도착 이런 단어는 잘 안 들리게 처리했다. 사실 그 고자 설정이 나온 게 보충촬영 때다. 대구에서 올라온 지 2주가 지나 배우들을 다시 모아 보충촬영에 들어갔다. 특히 전영록 코치의 인과관계가 좀 필요하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가 우연히 컴퓨터에서 “내가 고자라니!!” 하는 그 유명한 동영상을 봤다. <야인시대> 드라마를 만든 분들도 의도한 건 아닐 텐데 이렇게 키치적으로 두고두고 활용될 줄 누가 알았겠나. 김두한한테 폭행당한 심영이란 분이 좌파 인사라고 알고 있다. 그분께는 정말 죄송한데, 웃기긴 너무 웃기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고자가 되어버렸으니…. ‘고자라니’ 요들송도 있는 거 아나? (일동 폭소) 하여튼 넷이서 그걸 보다가 농구장에서 데굴데굴 구른 다음에, 이거다, 전영록한테 이걸 넣자 합의했다. 전영록이 대충 코치가 됐다고 치자. 이 사람이 실제 육상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재영의 내레이션을 보면 초등학교 극기훈련 캠프 조교였다고 나오는데. 군대에서는 중사까지 했고. 뭔가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어쨌든 이 사람이 군생활하면서 망가진 몸을 극복하는 사이비트레이닝을 했는데 그게 몇몇 군인들한텐 또 플라시보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파편화되어 있던 전영록의 사연이 바로 그 비밀과 트라우마를 통해 한번에 묶였다. 사실 장대높이뛰기가 위험하긴 하다. 5m짜리 철막대에 항문이 찍힌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아, 그건 정말….
-<도약선생> 이전에 찍은 단편 <두근두근 영춘권>까지, 두 작품 모두 캐논 5D로 찍었는데.
=뭔가 아련함이 돋는 화면이 필요할 때 주로 캐논 5D를 쓰게 되더라. 인디밴드를 아련하게 찍거나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찍거나. 그런 정적인 화면 말고 동적인 장면을 찍으면 어떤 효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두근두근 영춘권>을 찍고 나니 이걸로 <도약선생>을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포커스가 안 맞아도 괜찮았다.
-시를 쓰는 트레이닝은 어떻게 나온 건가.
=장대높이뛰기 트레이닝을 입체적으로 구현할 수 없다면 잔재미를 주는 게 뭐가 있을까. 김연아 선수 같은 경우는 기술과 표현력에 더해 의상과 음악 선곡까지 총체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잖나. 장대높이뛰기에서도 예술 점수를 넣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한 거다. (웃음) 그럴 때 시 쓰는 건 괜찮은 장치였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2010년에 나왔던 한국 예술영화들을 좀 패러디하는 기분도 있었다. <시>를 좀 의식하기도 했고. (웃음)
-안 그래도 <시>라든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떤 장면에선 <하하하>를 살짝 의식한 게 있었다.
-참고 문헌으로 <일본 하이쿠 선집>과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가 언급되던데.
=하이쿠는 배우들이 직접 쓴 시에서 운율이 좀 안 맞는다 싶을 때 조금씩 섞어넣었다. 보네거트 책에서는 금치산자 판정을 받은 부자 로즈워터씨가 유토피아에 성적 쾌감을 느낀다는 언급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상주의자가 이상사회와 평등사회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거다. 전영록 코치의 페티시를 설명할 때 참고했다.
-‘9와 숫자들’의 리더 9송재경이 만든 주제가 <도약은 패턴>, 간질간질하게 좋더라. 엄청 웃기기도 하고.
=재경씨와 가편집본을 함께 보면서 80, 90년대 라디오 심야음악프로그램 시그널송 같은 느낌을 얘기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뭔가 프랑스풍의 그런 음악. 그 다음날 바로 샘플을 보내왔다. 이걸 아예 샬롯 갱스부르와 세르주 갱스부르가 근친상간 느낌으로 부르던 샹송처럼 발전시키기로 했다. 원래 내가 가사를 다 썼어야 했는데… 게으름 부리다가 녹음실에 가서야 배우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가사를 썼다. 재경씨의 눈치 보면서 “이렇게까지 장난치는 가사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더라. 재경씨가 정말 사람이 늠름하다. 남의 치졸함과 서투름을 해맑고 다부지게 받아준다.
-차기작은.
=청년필름에서 로맨틱코미디 기획을 제안받아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원래 한달 만에 다 쓰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두달째 2/3밖에 못 써서 김조광수 대표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이번엔 철저하게 기획영화 마인드로, 굉장히 전통적인 로맨틱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