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스캔들>의 남장여자 ‘윤희’가 주었던 파란 정도라면 적어도 그 여운을 조금은 즐길 줄 알았다. 박민영에겐 그런 여유는 호사처럼 보였다. 곧바로 공포영화 <고양이>의 촬영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첫 영화라는 기대를 되새김질할 새도 없이 그녀는 지금 드라마 <시티헌터>의 촬영으로 바쁘다. 인터뷰가 끝나면 80명의 스탭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곧장 가야 한다고 했다. 하나의 캐릭터를 격파하는 듯한 강한 에너지. 그녀는 잇단 도전이 바로 박민영이라는 고정 이미지를 무한변신시켜줄 해답이라고 확신했다. <고양이>와 함께 벌써 다음 영화가 기다려지는 배우 박민영을 만났다.
-첫 영화 도전이다.
=즉흥적이고 상대의 리액션을 보면서 연기하는 스타일이다. 드라마는 순발력을 요하니 내게 맞다 싶었고, 그래서 드라마쪽으로 많이 파고들었다. 영화를 해보니 앞으로 더 해야겠다 싶더라. 회사에선 싫어하겠지만(웃음), 로맨틱코미디도 해보고 싶고 아주 진한 멜로도 해보고 싶고 영상이 예쁜 영화도 남겨보고 싶다. 만날 드라마만 찍다보니 여유가 없었다. 한신 한신을 최상의 컨디션에서 찍고 싶다. 이번에 그 욕심이 생겼다.
-장르색이 강한 공포영화에 도전한 건 좀 의외다.
=첫 영화라는 게 상징이고 계속 남는 거다. 다들 “몇년이 지나도 네가 보고 싶지 않은 연기가 계속 나올 거야”라더라. 그런데 한번 도전해볼 만한 장르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앞으로 나이 더 먹으면 안 할 것 같은 장르더라.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이제 아니까 그런 쪽으로만 하려 하겠다 싶더라. 스스로를 타이트하게 조이는 의미에서도 해봐야지 싶었다.
-장르 특성상 여성캐릭터는 수동적이고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장르와 캐릭터는 짝꿍처럼 붙어다닌다. 로맨틱코믹물의 여자가 캔디고 남자가 왕자이듯 공포 장르라면 여린 여자가 놀라줘야 한다. 그래야 관객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관건은 이 전형적인 캐릭터를 어떻게 자기화하느냐다. 답이 정해져 있다 해서 부담이 된다거나, 나는 다르게 해봐야지, 이런 생각은 안 했다. 그냥 상황을 즐기다보면 나도 모르게 리액션이 나오는 거고, 그게 설령 다른 데서 이미 본 거라고 해도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차이는 나와 함께 작업한 감독님, 스탭들이 만들어줄 테니 내 연기는 소신있게 했다. CG의 힘을 믿고 있다. (웃음)
-변승욱 감독 전작이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공포의 색깔이 조금 다를 여지가 있어 보인다.
=감독님 뵈니 어떻게 공포영화를 찍으실까 싶더라. <성균관 스캔들>을 찍고 있을 때 만나서 그런지 상투만 틀면 바로 선비님이실 것 같더라. 그런 분이 공포물을 하자고 하니 의외성이 있는 거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웃긴 연기를 하던 박민영이 공포연기를 하는 것도 의외성이다. 이창동 감독이 공포영화 제작을 했다는 것도 의외성이다. <시>와 <밀양>을 제작하는 제작사에서 공포영화라니 좀 안 어울리지 않나? 그 의외성들, 불협화음이 오히려 특이한 작품을 만들겠다 싶었다. 이 장르를 잘 아는 사람보다 다른 감성이 나올 것도 같고.
-어떻던가. 기대했던 대로의 효과가 나타나던가.
=너무 쉽게 본 거였다. (웃음) 보통 10시간이면 후시를 따는데 웬걸 우린 17시간 정도 걸렸다. 감독님이 그만큼 디테일하니까 믿음이 가면서도 찍을 때는 좀 힘들었다. 난 그 연기가 맞는 것 같은데 미세한 차이를 자꾸 잡아내시니 과연 저게 정답일까 하는 마찰도 있고, 혼란도 있었다. 드라마는 바로 모니터 할 수 있어서 감독님의 디렉션이 맞는지 바로 다음 주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개봉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윤희(<성균관 스캔들>)가 워낙 강렬한 캐릭터였는데 벗어날 시간도 없이 바로 소연으로 넘어가야 했다.
=초반에 너무 힘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오라는 주문을 받고, 촬영 전에 파리에 갔다 왔다. 1주일, 길지도 않았다. 반년 동안 찍었는데 일주일 휴가 주고 지금까지 한 걸 비우고 오라는 거다. 역시나 초반엔 좀 헤맸다. 매번 느끼는데 이전 캐릭터를 버리고 다른 캐릭터를 입는 게 쉽지 않다. 다행인 건 <고양이> 촬영이 쉽지 않아서 저절로 집중이 되더라. (웃음)
-최근 스케줄이 계속 그렇다. <고양이> 끝나자마자 드라마 <시티헌터> 촬영을 시작했다.
=<고양이> 촬영 끝난 바로 다음날 <시티헌터> 대본 리딩 갔는데, 아, 내가 지금 누구지. 윤희였나, 소연이었나. 나나(<시티헌터>)는 갑자기 밝아져야 하고 그래서 헷갈리더라. 근데 누구 탓을 하겠나. 내가 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그런 걸 티 안 나게 얼른얼른 따라잡아야 한다. 물론 그런 스케줄을 원했던 건 아니다. 최소한 한달의 공백은 필요하다.
-촬영은 어땠나. 고양이를 둘러싼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역할이지만 본인 스스로 폐소공포증이라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있는 캐릭터였다.
=사육이었다. (웃음)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세트에 하루 네끼 식사 제공. 소연이 폐소공포증이 있는 설정이라 세트도 답답하게 디자인됐다. 물론 그게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 찍다보니 나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우울해지더라. 원래 밝은 성격인데 확실히 다운되고 황폐해지더라. 심리적으로 좀 힘들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데뷔와 함께 주목받다가 연이은 드라마 <자명고>로 대중의 외면이라는 혹독함도 치렀다. <성균관 스캔들>이 연기 사춘기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라고 했는데, <고양이> 이후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처음 막 달리기했을 때보다 여유가 생겼다. 근데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아직도 연기가 고프고 새로운 캐릭터도 하고 싶다. 요즘은 20대 중반에도 나이를 먹는구나 싶다. (웃음) 난 계속 22살인 거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20대 초반에 별로 활동 안 했으니 이젠 달릴 시간이다. 출연작 DVD랑 대본이 쌓일 때마다 내가 알뜰하게 시간을 썼구나 싶어 뿌듯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인정받는 것’은 무엇인가. <시티헌터>의 경우 예상보다 저조한 평가인데 그런 반응을 핸들링할 여유는 생겼나.
=선택부터 의외성이 있는 편이다. <고양이>가 의외였던 것처럼 <시티헌터> 할 때도 모두가 의외라고 했다. 근데 난 그냥 뭐, 잘 안 따진다. 하고 싶으면 뭐든 즉흥적으로 한다. 드라마는 이제 나름대로 기준이 생겼다. 캐릭터가 좋거나 작품이 재밌거나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시티헌터>는 감독, 작가에 대한 기대로 다들 만류하는데도 했고, 내가 선택한 작품은 그게 흥하든 아니든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배우라면 자신의 성공적 이미지를 보존하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작품 선택의 패턴으로 본다면 매번 그걸 깨려는 시도가 보인다.
=계속 알을 깨고 나오고 싶다. 진짜 박민영의 모습은 뭐야, 할 정도로. 한정된 이미지를 만드는 게 상업적으로는 좋겠지만 재미가 없어진다. 배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거였다. 편견을 계속 깨는 데서 에너지와 즐거움을 느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유미를 보고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를 맡길 순 없었겠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기회가 생기는 거다. 도전을 하는 게 청춘 아닌가. 장르를 오가며 찬물과 더운물을 한번씩 맛보는 게 결국 내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 선택 기준 때문에 도전할 것도 습득할 것도 많다. 몸이 고생이다.
=힘들어 죽겠다. <시티헌터>는 정말 고생 안 할 줄 알았는데, ‘액션 나나’가 되고 있다. (웃음) 근데 그냥 대사만 하는 것보다 임팩트있는 장면이 나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도 난 멀었다. 하지원 선배님은 힘든 것만 찾아다니지 않나. 얼마 전 시상식에서 만났는데 드레스 입고 있는데도 운동선수인 줄 알았다. (웃음)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아무리 해도 선배만큼은 못하겠구나 싶었다. 내가 이러다 죽지, 한 건 <성균관 스캔들>밖에 없었다. 선배님은 몇번을 ‘죽어야’ 했겠나.
-‘예쁘다’라는 기준이 남다르기 때문에 올 수 있는 선택이다.
=내가 그런거 되게 안 할 거 같지 않나. 근데 <시티헌터>도 유도신 이런 거 욕심 많다. 팔랑귀라 예쁘게 나온다면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한다. 프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 생각한다. 배우라면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의무다. 그만큼 결과를 보여주려면 노력을 해야 하고, 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칭찬을 받을 건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 조금 느슨해졌다고 생각하면 다음 작품은 굉장히 힘든 걸 택할 거다. 내 캐스팅 기사 보고 이번에 힘든 거 하네 싶으면 내가 나를 잡는 건 줄 알아라. 다음 작품을 보면 전작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거지. (웃음)
-그런 의미에서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요즘은 내가 좀 느는 게 보여서인지 매니저들도 요구를 많이 한다. 너무 급하지만 않다면 많이 해보고 싶다. 근데 큰일이다. 쉬운 역할엔 좀체 매력을 안 느낀다. 자극적인 것만 먹다보니 자극적인 게 맛있고 당기는 거다. 남장연기를 하니 웬만큼 터프해선 터프한 것 같지도 않고, 공주 역할을 해보니 웬만큼 예뻐선 예쁜 것 같지 않고, 공포영화를 하다보니 웬만큼 서늘해선 서늘함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연륜이 쌓이다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런 연기를 찾겠지만 지금은 일단 자극적인 도전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