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망한)능력자들> 중 사막 복판에서 태양을 영접 중인 조지 클루니. 요가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문의한 결과 ‘전사 자세’의 일종인 ‘비라바드라 원 아사나’로 판명됐다. 그나저나 클루니 덕분에 장차 이 자세를 취하며 고른 호흡을 유지하긴 글렀다.
*<일루셔니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6월12일
영화 <맨 인 블랙>이 마이클 잭슨, 실베스터 스탤론, 뉴트 깅그리치 같은 명사들을 지목해 지구인으로 위장 체류 중인 외계인입네 폭로(?)했을 때, 나는 어처구니없는 척 박장대소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랜 용의자인 감독 겸 배우 자크 타티(1909~82)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영화사에 잠입한 외계인이 있다면 타티 말고 달리 누가 있겠는가? 육척이 훌쩍 넘는 거구에서 나온다고 믿기 어려운 깃털 같은 움직임, 그가 연기할 때면 합을 맞춘 상대 배우처럼 ‘협조’하는 소품들, 그리고 타티의 페르소나인 윌로씨가 걸어 들어가는 공간마다 인물과 사물의 궤적이 빚어내는 기적적 화음을 지구별의 조홧속만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타티가 이 세계를 잠시 방문했을 뿐이라고 믿고 싶은 건 그가 성공을 맛보지 못한 불우한 영화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랑스런 거인에게 돌아갈 다른 별이 있었다면 우리 마음은 한결 평온해질 테니까.
타티의 유작 시나리오를, 그를 모델로 한 캐릭터를 주인공 삼아 완성한 실뱅 쇼메의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를 보는 동안, 내 눈이 윌로씨와 자크 타티의 흔적을 무의식적으로 찾아 헤맨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오도된 기대였다. <일루셔니스트>의 유랑 마법사 타티셰프(타티의 본명이다)는 윌로씨가 아니며 실뱅 쇼메 감독은 타티의 우주를 모방하지 않았다. 타티셰프는 윌로씨보다 온도가 높은 캐릭터다. 즉, 윌로씨가 버스터 키튼의 근친이라면 타티셰프는 찰리 채플린의 형제다. 그는 언제나 소매 속에 꽃다발을 숨겨놓는 사내지만 우리는 그 꽃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봐 마음 졸이게 된다. <일루셔니스트>는 다양한 조형미를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상대를 보살피려는 사람의 제스처에 깃든 아름다움이다. 꼬마의 말을 잘 듣기 위해 기울인 상체,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뒷걸음질, 물건을 건네주는 행위를 작은 이벤트로 만드는 우아한 손짓. 실뱅 쇼메 감독은 반드시 껴안지 않아도 심지어 피부가 닿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하는 두 인간의 몸짓은 유려한 2인무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
전작 <벨빌의 세 쌍둥이>로 실뱅 쇼메를 추종하게 된 관객이라면 <일루셔니스트>가 지나치게 부드러운 슈크림이라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콤함은 껍데기까지만이다. <일루셔니스트>의 비탄은, 영화의 소소한 디테일과 원경 안쪽에 가라앉아 눈 밝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휘황한 에든버러의 밤거리에는 걸인을 둘러싸고 발길질하는 잔혹한 10대들이 있고, 부랑자로 전락한 복화술사 옆으로는 뒷다리에 바퀴를 매단 앉은뱅이 개가 지나간다. <일루셔니스트>는 결국 엔터테이너들이 감내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마술사 타티셰프와 곡예사들은 신세대 록 밴드에 무대를 빼앗기지만 영화는 얼마 뒤 그들을 밀어낸 록 스타가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신문 헤드라인을 슬쩍 비춰 그네들도 끝내 영락을 피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반(半)무성영화에 가까운 <일루셔니스트>는 끝까지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식의 완곡 화법을 고집한다. 사랑하는 소녀에게 “마법사는 없단다”라는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떠나가는 기차 안에서, 타티셰프는 맞은편 자리 꼬마가 떨어뜨린 몽당연필을 줍는다. 마침 그에겐 바꿔치기할 긴 연필도 있다. 예전의 남자였다면 기꺼이 속임수로 아이를 기쁘게 했으리라. 그러나 타티셰프는 그냥 몽당연필만 집어주고 만다. 딸깍. 순간 누군가 세상 마지막 전등의 스위치를 내리는 서늘한 소리가 들린다. <일루셔니스트>는 누구보다 환상(illusion)을 믿을 수 없는 자는, 다름 아닌 환상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역설을 속삭인다.
6월15일
수목드라마 <최고의 사랑>의 구애정(공효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시크’하지 않다는 죄목으로 지난 세기부터 장기간 박대받아온 인물 유형을 힘차게 부활시켰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착한 사람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느니 본인이 손해보는 쪽이 속 편한 인물, 내게 닥칠 피해가 상대의 그것보다 한줌이라도 적어 보이면 잘잘못 가리기 전에 덥석 받아안아버리는 이, 그러고도 자기의 버릇이 미덕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 욕심나는 남자 앞에서도 허허실실 헤아리지 않고 순간의 진실만 말하는 여자. 구애정은 자연스럽게 선량한 인간이 흥미로운 인물일 수 있으며, 상하고 뒤틀린 괴짜 캐릭터 못지않게 주연을 감당할 매력이 있음을 새삼 환기시킨다. 그런데 이 성공의 큰 몫은 배우 공효진이 가진 담백한 기운에 빚지고 있다. 구애정이야말로 공효진이 연기한 어떤 캐릭터보다 실제 그녀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내 섣부른 짐작을 부추긴 것은 2년 전 그녀를 잘 아는 배우 류승범과 가졌던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이 친구는 정말 낙천적이에요. 신이 내린 평범한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희로애락을 다 받아들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쓰레기는 꼭 분리수거하고…. 그런데 평범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세상이라 독특한 매력을 갖게 된 거죠.” 마치 구애정에 관한 묘사 같지 않은가.
6월16일
천재에 관한 많은 영화들이 비범한 자들의 평범한 ‘인간적’ 애환을 조명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만 내게 묻는다면 역시 천재를 다룬 영화에서 보고 싶은 건 천재다움이라고 말하겠다. 그런 필요에 비추어 <소년 KJ>는 만족스럽다. 장면1. 열한살치고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년 KJ가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객석 앞줄에 앉은 노부부의 주름진 얼굴은 묻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거쳐서야 알게 된 생의 비의를 저 아이는 어떻게 즉각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노부부에게 깊이 동일시하고 만다. 장면2. 음악학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열일곱살의 KJ는 친구들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무대 공포를 극복하려면 너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면 돼. 이번에도 남을 의식하면 넌 사람도 아니야.” 옳은 역설이다. 당신이 남을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당신을 시간 들여 바라볼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 하긴 그 누가 나를 의식하는=내게 영향 받는=내게도 있는 것을 나눠가진 사람에게 구태여 귀기울이겠는가? 장면3. KJ는 카메라 앞에서 진지하게 자문한다. “왜 집중해서 피아노를 치면 소리가 달라지는 걸까?” 예술가를 향한 좋은 질문의 예. 장면4. 꼬마 KJ가 돌연 말을 쏟아낸다. 인생은 무의미해요. 내겐 피아노가 있지만 사람들은 다들 재미없게 살잖아요. 모두가 음악을 안다면 세상은 완벽해질 텐데. 인간은 왜 태어나고 존재하죠? 피아노를 시작하면서 그게 궁금했어요…. 인간이 죽는다니 다행이에요. 침묵이 흐르고 소년은 자신의 양손을 들어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불현듯 흐느끼기 시작한다. 순간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 앞의 생> 도입부가 되살아났다. 그 소설에서 소년 모모는 이웃의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도 살 수 있냐고. 할아버지가 수치심을 느끼며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 소년은 울음을 터뜨린다.
나열한 장면들이 주는 교훈은 다큐멘터리스트에게도 시인의 귀와 화가의 눈은 긴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야 수년을 들여 치열하게 취재한 아흔아홉개의 팩트에 빛을 던져줄 하나의 순간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20일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스타워즈>에 심취해 성장한 소년이 코미디에 재능이 있고 캐스팅 복이 터지면 나올 법한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 조지 클루니, 제프 브리지스, 케빈 스페이시의 개그콘서트라 해도 무방한 이 코미디에서 클루니와 브리지스는 각기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와 <위대한 레보스키>의 캐릭터로 복귀해 한바탕 놀아젖히고 있는데 어디선가 코언 형제가 벌떡 일어나 저작권을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무려 오비완 케노비인 이완 맥그리거가 조지 클루니로부터 제다이 정신의 기초에 대한 강의를 듣는 장면도 잊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