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내 꿈은 은주처럼 사는 거였다. 매일 저녁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8시30분에 맞춰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독서실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그 30분, MBC에서 <보고 또 보고>를 하는 시간이 나에겐 몇 안되는 삶의 낙이었다. 왜 하필 <보고 또 보고>였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다만 그때, 고작 열여덟살에 불과했던 나는 인생에 피로감을 느끼는 첫 번째 단계에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점수를 다퉈야 하는 일상이, 모의고사와 내신평가의 긴장감이, 불안한 대학 레벨이, 그리고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 할 모든 날이 두렵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은주(김지수)는 이 모든 구질구질함을 뛰어넘어 마침내 원하는 것을 쟁취한 승리자였다.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언니 금주(윤해영)에 비해 온갖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던 끝에 결국 부잣집 아들인 검사와 결혼하다니! 게다가 시댁의 온갖 반대와 구박마저 한식집에 가서 직접 음식을 배워 가족을 먹일 만큼 부지런한 성격과 야무진 솜씨로 극복하고, 어려운 상대인 시어머니 대신 시할머니와 함께 목욕을 다니는 고난도의 전법 즉 이이제이… 아, 아닌가. 어쨌든 평안하고 풍족한 결혼생활을 누리기 위한 은주의 노력과 성취는 실로 감명 깊었고, 당시 임성한 작가의 어린 양이었던 나는 다짐했다. 공부고 뭐고, 나도 나중에 잘난 남자 만나서 팔자 좋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야지….
물론,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잘난 남자 만나서 팔자 좋게 살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 다르게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혹은 타고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임성한 작가의 <하늘이시여>가 방송되고 있었고 나는 이십대 중반을 지난 워커홀릭이었다. 여전히 여주인공은 긴 생머리에 가느다란 허리, 주부잡지의 화보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패션의 청승가련형이었고 못된 계모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왕자님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물론 남편의 새엄마가 자신의 친엄마였다는 이상야릇한 출생의 비밀이 80회를 지탱하는 열쇠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요한 건 자경(윤정희)이 역시 부잣집 아들과 결혼해 월세 걱정, 물가 걱정 안 하고 평생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요즘 방송 중인 <신기생뎐> 역시 임성한 작가 특유의 비틀린 신데렐라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VVIP들을 상대하는 최고급 기생집이 현존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사랑과 애환, 아픔을 둘러보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문화적 자존심으로서의 기생의 역할을 다시금 재조명해보고자 한다”는 기획 의도 같은 건 말 그대로 ‘에이, 농담도 잘하시네!’일 뿐이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5년 안에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건, 며느리가 “토마토의 이 붉은 라이코펜 성분이 항암, 항산화 효과가 있거든요. 날로 먹는 것보다 올리브유에 익히면 라이코펜 섭취율이 높대서 죽염만 넣고 살짝 볶았어요”라며 끼니마다 영양학 강의를 하건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는 여전히 ‘팔리는 상품’이고 방송사는 기꺼이 전파를 제공한다. 입양아를 비하해도, 성소수자를 비웃어도, 접대문화를 미화해도 “욕하면서 본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시청률 1위를 보장해온 한 앞으로도 특별히 달라지는 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여간해선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단아한 미소와 정갈한 앞치마로 포장된 그의 드라마 속 기이한 악의와 크고 작은 불쾌감을 감당하기엔 현실이 충분히 피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