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많은 여성과 여성을 이해하려는 남성에게 청량함을 안겨줄 <헤어드레서>
2011-07-13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긍정적이지만 운은 없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카티(가브리엘라 마리아 슈메이데)는 혼자서는 원피스 등에 달린 지퍼를 내릴 수도 없을 정도로 뚱뚱하다. <헤어드레서>는 미용사인 카티가 손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구조의 영화다. 그녀는 최근 모든 것을 잃은 것도 부족해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까지 얻었지만 여전히 유쾌하다. 불운과 맞서 끝없는 싸움을 벌일 수 있는 힘은 자신의 행복을 아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에서 비롯된다.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친구와 바람이 난 남편을 떠나 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한 카티가 자신의 미용실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커튼 줄을 잡지 않고는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고, 동물용 MRI 촬영 장비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비만인 카티는 외모 때문에 취업을 거절당하자 직접 미용실을 운영하기로 결심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만만치 않다. 사업계획서나 가게 디자인 도면 같은 것이야 어떻게 마련한다고 해도 선불로 내야 하는 한달 보증금은 현재 그녀에게 너무 큰돈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취업센터에서 은행 대출 창구까지 동분서주 뛰어다녀봐도 길이 보이지 않던 차에 전직 미용사 실카를 만나 양로원에 이동 미용실을 차린다. 양로원에서 번 돈에 딸 저금통까지 몰래 털어서 겨우 보증금을 마련해가지만 이번에는 취업센터가 파업 중이다. 난감한 카티 앞에 나타난 이민 브로커는 위험하지만 고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을 제안하는데 불법 이민자들을 수송하는 것이다. 딸 돈을 갚기 위해 한번만 일을 하기로 한 카티는 폴란드 국경지역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고 이후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도리스 되리의 이번 신작은 <내 남자의 유통기한>(2005)이나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보다는 그녀의 색채를 각인시킨 <파니 핑크>(1994)와 가까워 보인다. 세상과 맞서 홀로서기를 해보려 갖은 노력을 하는 노처녀 파니와 이혼녀 카티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 비슷하다. 하지만 파니가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죽음을 연습해도 외로움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것처럼 카티가 되새기는 긍정적 사고도 현실의 제약 앞에 번번이 무기력해지곤 한다. 도리스 되리의 특기는 현실의 냉혹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파니나 카티가 결코 주저앉지 않게 만드는 균형감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니 핑크>나 <헤어드레서>는 우울한 주인공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통일 뒤 독일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싱글맘 카티의 역경 안에 버무려놓은 <헤어드레서>는 페미니즘이나 사회학 담론을 영화로 구현해놓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성문제, 불법 이민자 문제, 외모차별 문제 등 온갖 사회적 이슈들이 거론되고 있어 어떻게 이렇게 한명의 여주인공의 삶에 골고루 등장시켰을까 싶다. <헤어드레서>는 뚱뚱하지만 씩씩한 중년 여성의 생존기를 보여주는 한편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영화의 모든 고난은 현실적이지만 이를 극복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 남편은 뺏겼고, 잠시 위로받은 남자는 떠났고, 딸은 유학을 갔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좀 안 좋았을 뿐이고 전부 지난 일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카티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뚱뚱한 남자를 뚱뚱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바람난 전남편이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하는 철없는 여성이다. 만일 카티가 동병상련의 정으로 남자를 만나고 위로받았다면 그녀의 무모함이 설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갖가지 색깔의 머리카락을 커팅하는 모습으로 시작된 영화는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고 춤을 추는 뚱뚱한 여자들이 등장하는 엔딩 시퀀스로 마무리된다. 컬러풀하면서도 발랄한 한편의 페미니즘 판타지로서 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헤어드레서>는 많은 여성과 여성을 이해하려는 남성에게 청량함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다. 영화가 끝날 무렵 카티의 이야기도 마무리되고 머리를 맡긴 손님이 산뜻한 모습으로 변신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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