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개>는 강한 의미에서 ‘김기덕 사단’의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2008) 역시 김기덕의 원안을 바탕으로 해서 장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영화에는 기존의 익숙한 ‘김기덕의 세계’와는 달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인 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는 전형적인 김기덕 캐릭터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인물이고, 그 둘 사이에서 형성되는 역학 관계도 이전의 김기덕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다. 둘 모두 김기덕의 영화 세계 속에 서식하던 김기덕식 ‘단독자’ 또는 ‘짐승-인간’의 형상과는 다른 인물이다. 가령 <나쁜 남자>의 조재현-한기와 <영화는 영화다>의 소지섭-강패는 똑같은 깡패 두목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 이전의 김기덕 영화에서 ‘버디무비’적 코드가 차용되었던 적도 없다. ‘김기덕 영화’와 ‘김기덕 사단’의 영화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좀더 적극적으로 장르적 코드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기덕 영화는 그저 김기덕 영화일 뿐,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적 범주에 쉽게 포획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덕 사단의 영화는 특정 장르 또는 장르의 조합으로 좀더 용이하게 번역이 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풍산개>는 <영화는 영화다>와 마찬가지로 김기덕 사단의 영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영화는 영화다>보다 훨씬 더 김기덕의 원형적 세계에 가까워 보이는 면이 있다(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말이 장훈 감독과 전재홍 감독이 김기덕의 원안에 입힌 자기 색깔의 정도 차이(창조적 자율성)에 대한 언급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척력과 인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풍산과 망명남
<풍산개>의 남자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김기덕의 영화 세계에서 말을 잃었거나 말하기를 거부하는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이름은 주어져 있었다. 사실 영화 속에서 단 한번도 그 이름이 사용될 필요가 없는 경우에조차, 김기덕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을 주곤 했다(가령 <섬>의 희진, <나쁜 남자>의 한기, <빈 집>의 태석 등). 그런데 <풍산개>의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따라서 우리는 그를 편의상 ‘풍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사실 풍산뿐 아니라 영화 속의 모든 남자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름은 ‘인옥’(김규리)뿐이다. 그 이름의 삭제는 의도적 또는 전략적이다. 김기덕-전재홍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정체불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그 ‘정체불명’이 갖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인옥을 중심으로 삼각관계에 들어서는 두 인물, 그러니까 주인공 ‘풍산’과 또 다른 (준)주인공인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에게 이름의 삭제가,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상실 또는 혼동’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나머지 인물들에게 그것은, 그들이 지닌 ‘익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북 기관원들은 현실에서 그런 것만큼이나 <풍산개>의 영화적 문법의 맥락에서도 기능적이고 익명적인 존재들에 불과하다.
‘풍산’의 행적을 뒤쫓다보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김기덕 영화 세계 속의 인물들이 있다. 그는 <해안선>의 ‘강 상병’(장동건)과 <빈 집>의 ‘태석’(재희)의 후예다. 이 두 영화가 ‘어떻게 그들이 유령이 되어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면 <풍산개>는 이미 ‘유령’이 된 풍산의 이야기다. 그들이 유령이 되었던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그들은 군사적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거나(강 상병의 경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시스템 바깥의 존재가 되고자 ‘유령’이 된다(태석의 ‘유령 연습’). 하지만 ‘풍산’이 유령이 된 이유는 명확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영화에서 암시적으로 주어진 단서를 통해 추론해 보자면 그는 남북 어느 쪽인가의 ‘총에 맞아 죽은 귀신’이지만(원혼으로서의 유령), 남북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기를 선택한 유령이다(탈주로서의 유령). 말하자면 그는 강 상병과 태석 사이의 혼혈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서식지에 (아마도 동료들의 것으로 짐작되는) 철모와 수류탄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는 강 상병의 후예이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질주하는 태석의 자손이기도 하다.
풍산은 분명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계인’이지만 남과 북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거리는 결코 등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남한에 거주하고, 남한(?)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일제 카메라 및 시계를 지니고 다니지만 담배는 북한 담배를 피운다. 그의 생존의 기반은 남한이지만 그의 생리의 뿌리는 북한이다. 짐작건대 그는 ‘남파된 북한의 무장 공작원이면서 홀로 살아남아 남한에서 생존 능력을 획득한 인물의 유령’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이런 추론을 보충하는 몇 가지 단서가 더 있다. 첫째, 그는 남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도주의적 메신저’이지만 항상 먼저 남한에서 북한으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남한 사람을 위해서 북한 소식을 전하는 자라기보다는 북한 사람을 위해서 남한 소식을 전하는 자인 셈이다. 둘째, 그가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철저히 생략되어 있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보기보다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북쪽의 경계선은 아직 ‘전기식’이지만 남쪽의 경계선은 이미 ‘전자식’이라는 설정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매우 ‘리얼’해 보인다). 유령인 풍산에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와 ‘풍산’ 사이에는 미묘한 애증의 교감이 흐르고 있다. 둘은 같은 ‘담배 맛’을 공유하고 있고, 끌리는 여성상이 동일하다. ‘망명남’이 보이는 과도한 질투심은, 그가 느낀 풍산의 정체에 대한 직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저놈, 묵직한 거이, 내가 보기에도 매력있어”). 사실 이 ‘망명남’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두터운 입체감을 지니고 있는 조연(준주연)이다. 비슷한 삼각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빈 집>의 삼각관계에 비해 <풍산개>의 삼각관계가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이유는, <빈 집>의 남자가 갖고 있지 못한 어떤 두터움을 이 ‘망명남’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 망명을 택했지만 아직 남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기를 주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망명객이 지닐 수밖에 없는 본원적 불안 때문이기도 하고, 여전히 북쪽에 대해 갖고 있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불안을 덜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김정일에게 사과하면서 인옥을 풍산에게 맡기겠다고 한다. 풍산과 망명남 사이에는 척력과 인력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
분명 <풍산개>의 정서적 무게가 남쪽보다는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이 말이 이 영화가 ‘친북영화’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서적 편향은 남북분단을 소재로 한 일련의 ‘남한영화’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일종의 코드가 된 지 이미 오래다(미워해야 할 적이라기보다는 동정과 연민을 품게 되는 타자로서의 북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산개>에 어떤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망명자 또는 탈북자가 지니게 되는 어떤 ‘정체불명’의 감정, 즉 ‘정체성의 불안’을 이 영화가 예민하게 포착하고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영화 <풍산개>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또는 수수께끼는, 마지막 엔딩에 비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태극기’다. 그 비장한 음악 또는 태극기가 함축하고 있는 정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수수께끼 또는 자가당착과 모순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풍산개>는 아주 강한 의미에서 김기덕 사단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또는 의도적으로 <풍산개>에 대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풍산개>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장르(또는 장르 복합체)영화로 충분히 즐길 만한 만듦새를 취하고 있다. 즉, <풍산개>는 남북 대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가볍고 경쾌한 ‘슈퍼히어로’ 영화, 그것도 농도 짙은 ‘멜로적 감성’으로 충만한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로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은 아무래도 연출자 전재홍의 몫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어쨌든 <풍산개>는 이후 계속될 ‘김기덕 사단’의 영화에 대해 어떤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