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모두들 수군거렸다. “<그을린> 봤어?” 캐나다에서 날아온 이 낯선 영화는 부산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이 영화가 <그을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다. 언뜻 기이한 제목은,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해가 간다. 프랑스어 원제 ‘incendie’는 ‘화재, 전란, 감정의 고조, 폭발’ 등을 뜻한다. 실상 ‘그을린’이라는 표현은 영화 내용을 그대로 함축하는 원제에 비해 대단히 우아한 시적 압축이다. <그을린 사랑>은 그 자체로 격렬한 폭발이기 때문이다.
비밀스런 여인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이 숨을 거둔다. 나왈의 상사였던 공증인 르벨은 쌍둥이 자녀 잔느(멜리사 드소르모-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에게 그녀의 유언장을 건넨다. 뜻밖의 유언에 잔느와 시몽은 당황한다. 자신의 무덤에 관도, 비석도, 비문도 필요없다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으라는 것이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는 그때 비석을 세워다오.” 단서는 나왈의 옛날 여권과 흑백 사진 한장뿐이다. 캐나다에서 죽 살아왔던 남매는 중동 출신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긴 여행을 떠난다. 낯선 지형을 통과하고 알지 못했던 역사와 조우하며 그들은 나왈의 충격적인 과거와 마주친다.
이론수학의 난제를 풀어나가듯
<그을린 사랑>은 처음부터 이론수학의 난제를 관객에게 던진다. 극중 잔느의 전공은 이론수학이며, 그에 따라 스쳐가듯 두 가지 유명한 수학문제가 영화에 언급된다. 먼저 ‘콜라츠의 추측’이다. 자연수를 하나 고른다. 이 수가 짝수면 2로 나누고,홀수면 3을 곱한 다음 1을 더한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 결국 다시 1이 된다. 두번째로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프레겔 강에 건설된 다리 7개를 한번에 한개씩 지나가며 모두 통과할 수 있는가’의 불가능성을 입증해보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정리다. 잔느의 지도교수는 단정한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지. 영혼이 평화롭지 못하면 이론수학은 끝장이야.”
집에 돌아온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며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알아볼 수 없는 아랍 글자가 쓰여진 벽 앞에 선 젊은 나왈은 약간 두려워하는 듯, 주저하는 듯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부식된 사진은 나왈의 얼굴선을, 표정을, 모호하게 만든다. 나왈은 두려워하는가 혹은 대담하게 맞서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에? 잔느는 그 ‘무엇’, 미지의 변수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캐나다, 데옴, 다레쉬, 남부 지역, 데레사, 크파르 리얏 감옥, 데레사, 캐나다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은, 다리 하나를 한번만 통과해선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잔느는 시몽과 함께 “1+1=2여야 하는데, 1이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불가능한 공식 앞에 얼어붙는다. 이 공식은 잔느와 시몽의 출생의 비밀이자, 그들이 쌍둥이여야만 했던 이유이자, 해답을 너무 늦게 깨달은 나왈이 자살하듯 숨을 거둔 이유다.
잔느(와 뒤늦게 합류한 시몽)가 거쳐가는 지역은, 마치 연극의 장이 나뉘듯 영화 중간중간 소제목으로 명시된다.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감독 드니 빌뇌브는 “소제목은 연상 장치로서 꼭 필요했다”고 밝혔다. “결말부에 나오는 수학 등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모든 요소를 기억해야 한다. 원작 희곡에서는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수많은 반복적 요소들이 사용되었는데, 영화에는 그런 반복적 요소들이 적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마이클 스노가 “스크린 위에서 단어를 하나씩등장시키며 마침내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시켰던” 서스펜스와“장 뤽 고다르의 도발적이고 유머러스한 언어 사용”을 언급하며, “스크린 위에 문자가 펼쳐지는 효과”를 최대한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 역시 마지막 난제 앞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영화 속 ‘소제목’인 구두점들을 잘 기억해야 한다. 여정은 점점 더 오이디푸스의 그것과 닮아간다. 아주 먼 과거의 진실을 알기 위해 두 남매는 더듬거리며 낯선 시공간을 방황한다. 나왈은“세상을 등질 수 있게 엎어서 매장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충격적인 클라이맥스가 시작되기 직전 시몽은 “눈을 가린 건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야”라는 말을 듣는다. 눈을 가리는, 혹은 시선을 빼앗는 건 감당할 수 없는 비탄이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차라리 어떤 종류의 진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무지를 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부르짖듯 “그리고 나는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겠다”며 눈가리개를 떼어낸다.
정치색을 지워 보편성을 획득
나왈의 과거는 레바논과 무척 닮아 있는 중동 어느 지역에서 벌어진 내전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기독교와 모슬렘, 원주민과 난민이 뒤엉키며 서로가 자신만의 고통을 기억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던 1970, 80년대 레바논의 역사가 정확한 역사적인 팩트는 지워진 채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이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 <폴리테크닉>이 1989년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일어났던 총기난사사건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장소명과 살인범의 이름을 모두 익명으로 고집했던 것과 일치하는 선택이다. 그는 영화 속 사건이 하나의 특정한 이름을 갖게 되는 것, 그리하여 개별성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절한다. 심지어 배경을 발칸반도나 아프리카로 옮길까의 여부도 고민했다고 한다. 드니 빌뇌브는 서면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왈의 조국은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사이에 낀 조그만 지역, 가상의 국가 ‘푸아드의 계곡’(Fuad’s valley)으로 설정했다. 원작 역시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상의 분노와 복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특정한 정치색을 배제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택했다.”
<그을린 사랑>에서도 드니 빌뇌브는 캐나다와 중동의 지역색을 강조하지 않는다. 창백한 캐나다의 회색빛 겨울 풍경과 뜨거운 중동의 갈색 풍경은 매우 중립적인 채도로 설정된다. 카메라 프레임은 대부분 많은 여백을 남긴다.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것보다 인물과 공간, 분위기가 주고받는 감정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격렬하다. 육체적, 정신적 폭력은 종종 ‘고요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모호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폭력의 습격이야말로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처럼 그 나이와 성별과 진의를 구별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무표정의 물화처럼 <그을린 사랑>을 위치시킨다. <그을린 사랑>은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가지만 동시에 신화적인 시공간과 겹친다. 그럼으로써 놀라운 통시적, 공시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여정을 지탱하는 존재는 공증인 르벨이다. 그는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는 자, 신화나 전설 속에서 주인공을 목적지로 이끄는 이계(異系)의 존재처럼 보인다. 그는 나왈의 과거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죽은 이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관철시키는 직업 윤리를 충실하게 지킨다. 잔느와 시몽이 이 여정을 포기하려는 순간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라고 되풀이해 재촉한다. 나왈은 르벨을 통해 죽어서도 살아 있는 것이다. “공증인의 임무 중 하나는 고인의 유지와 그들의 성스러운 비밀을 돌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증인은 마치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의 사공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고리이다. 또한 공증인은 토지에 대한 기억을 돌보는 책임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나의 가족 중에는 공증인이 많다. 할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아버지, 삼촌들이 모두 공증인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공증인으로 일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는 일은 늘 내게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공증인들은 국가를 초월해 서로를 돕는 일종의 비밀스런 형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드니 빌뇌브)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악수
진실을 앎으로써 영혼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건 어쩌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실의 고통을 이겨낸 자만이 “분노의 흐름을 끊게 하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나왈은, 그리고 <그을린 사랑>은 끝내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악수를 건넨다. 어쩌면 이 부분에 있어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다. 어머니 나왈 때문에 “목구멍 속의 칼 같은 유년 시절”을 거쳐야 했던 잔느와 시몽의 고통에 대해선 영화는 침묵한다. 단지 “너희들은 분노의 흐름을 끊게 하는 약속의 시작이다”라는 죽은 어머니의 뒤늦은 축복 앞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나왈은 고통을 자신의 대에서 끊어내고자 했지만 그녀의 자식들 역시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를 통해 새로운 고통에 눈뜬다. 역사적, 신화적 비극이 순식간에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되는 이 순간은 다소 난감하다. “진실 앞에선 모두가 침묵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을 깨뜨리는 순간 자신의 비석을 세우고 장례를 제대로 치러달라는 나왈의 유언은 관객 역시 그 애도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좀처럼 참여하고 싶지 않은 내기를 제안하지만 분명 참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