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꼽혔던 <그을린>이 <그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개봉한다.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베니스 데이즈’ 부문 최우수작품상, 토론토영화제 최우수캐나다영화상 등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2011년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에도 노미네이트되었다. 어떤 영화이기에 이만큼 화려한 주목을 받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의식을 잃은 어머니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은 쌍둥이 남매 잔느(멜리사 데소르모-풀랭)와 시몬(막심 고데트)에게 이상한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에게 편지를 전해야만 자신의 장례를 허락하겠다는 내용이다. 잔느에게는 아버지를 찾는 임무가, 시몬에게는 형제를 찾는 임무가 주어진다. 시몬은 유언을 따르길 거부한다. 하지만 진실이 궁금한 잔느는 지도교수의 도움을 얻어 중동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난다. 점차 드러나는 어머니의 과거는 충격적이다. 캐나다로 오기 전 어머니는 정치범들을 가둔 감옥에서 15년형을 살았고 고문관의 강간으로 아이까지 임신했다. 어머니 역시 기독교도와 회교도, 민족주의자들과 난민간의 집단학살과 보복으로 얼룩진 역사의 희생양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시몬과 함께 잔느는 아버지와 형제를 찾고 캐나다로 돌아가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더 끔찍한 결말로 이끈다.
영화의 원작은 와이디 무아와드가 쓴 동명 연극이다. 무려 4시간에 달하는 연극을 130분 분량의 시적인 이미지들로 압축해놓은 것이 <그을린 사랑>이다. 그렇다고 영화를 연극의 요약본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번역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와이디 무아와드의 허락을 받아 그의 연극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연극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다. 레바논을 환기시키는 가상적 공간은 연극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덕분에 영화는 특정 지역 묘사에 대한 리얼리즘에의 강박을 덜고 좀더 자유롭게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이로 인해 영화는 제한된 정치적 논평이 아닌 보편적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원작의 설정이 감독의 신중함과 잘 맞아떨어진 부분이다. 반면 연극적인 미장센은 버렸다. 영화적으로는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숏으로 얼굴과 풍경을 대비시키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창밖의 풍경과 어우러지며 일찍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인격적 단단함을 느끼게 하는 나왈 마르완의 얼굴도 황량한 중동의 풍경과 화음을 이루며 긴 울림을 낳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왈이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내세워 학살에서 홀로 살아남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클로즈업으로, 쓰러진 듯 주저앉은 그녀의 뒷모습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아낸다. 이런 대비의 리듬이 영화의 정서를 빚어낸다. 영화의 편집은 ‘세공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정교하다.
<그을린 사랑>은 정치와 역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짊어진 영화치고는 유연하고 유려하다. 정학적인 공식에 함몰되지도 않고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피해가려는 요령을 부리지도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역사적 비극을 관조하는 시선에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이런 균형 감각은 앎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덕목은 ‘앎’이다. 모르는 게 약일까, 아는 게 힘일까. <그을린 사랑>은 시종일관 후자를 선택한다. 앎을 구해야 “영혼의 평온”도 얻을 수 있고 “불행을 벗어날 수”도 있다. 세대를 거듭해온 민족간의 갈등이나 종교 분쟁의 사슬도 끝내 끊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들이 구하는 앎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다. 진실에의 욕망이 영화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면 이 영화는 그 소명에 충실히 답한다. 오이디푸스 신화, 근친상간의 테마도 에두름없이 주파한다. 잔느를 비롯한 인물들은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진실을 구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는 윤리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다행히 영화는 도망가지 않고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관용을 답으로 제시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는 “함께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앎’이라는 덕목에 어울리는 품위있는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