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인디라마]
[김영진의 인디라마] 영화도 음악도 사람을 닮는 거겠지
2011-07-28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심심하지만 그 안에 미덕 있는 남다정 감독의 음악영화 <플레이>

남다정의 <플레이>는 딱 소문 그대로의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평을 쓰려고 한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그 영화는 평 쓸 게 없을걸요. 그냥 귀여운 음악영화예요”라고 말해줬다. 이 영화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수순으로 흘러간다. 대단한 극적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심심하다. 심심한 일상으로 끝내 끌고 가는 것이 거꾸로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다. 그게 아마 앞서 말한 그 누군가가 귀여운 영화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 막 음악계에 등장한 밴드 ‘메이트’ 멤버들의 실제 삶에 기초해서 만든 영화에 대단한 스토리가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삶도, 음악도, 미래의 비전에도 과장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 부풀림을 자제한 <플레이>에는 엄연히 극적 파장이 있다. 이 파장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유독 일상생활에서 소극적인 것에서 나온다. 그들의 연애사는 특히 지지부진하고 플롯에서 꽤 비중있게 전개되는 이 연애의 실패담이 등장인물들의 음악적 영감과 이어진다. 낭만적인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단한 음악적 열정과는 달리 그 열정이 소진되는 구체적 대상이라 할 타인, 여자와의 연애에선 그 열정을 속으로 삭이려만 든다. 영화 초반, 인턴십을 받으러 네덜란드로 떠나는 연인 수현이 집에 찾아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묻는데도 밴드의 건반주자를 맡고 있는 준일은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자기 음악을 하고 싶어서 사회적 활동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타협하지 않는 걸 보여줬던 준일의 이런 면모는 일관적인 부분이 있으되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 것을 하고 싶어서 사랑을 체념하려는 그에게 그의 연인 수현은 계속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감정은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이들의 이 날 대화는 파국으로 끝난다.

꽤 실력있는 기타리스트이자 준일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는 헌일의 심성도 준일과 비슷하다. 그는 영국 유학 중에 잠깐 귀국한 은채에게 반하고 그녀가 스승의 전시회를 돕는 일을 거들다가 좋은 관계가 된다. 은채가 영국으로 돌아갈 즈음에 헌일은 준일의 애인이 했던 말과 똑같은 취지의 말, 준일을 처음 만났을 때 준일이 마치 자기가 들은 얘기가 아니라는 듯이 충고했던 그 말을 은채에게 한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감정은 속이지 말자고 은채를 설득하지만 관계의 약속으로 삶의 미래를 구속하기 싫다는 은채의 완곡한 거부에 헌일은 무력하게 물러난다. 은채가 헌일에게서 몸을 돌려 멀어질 때 보이지 않는 골목 끝 어딘가에서는 헌일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음악 외에 삶의 다른 욕망 체념하는 인물들

준일과 헌일에 비해 어린 ‘메이트’의 막내이자 드러머인 현재는 그만의 연애 스토리가 없지만 모델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꽤 인정받을 만큼 세련된 외모와 달리 궁핍한 가난을 겪고 있는데도 구김이 없다. 밴드 멤버들 가운데 유독 그에게만 플롯상으로 연애담이 없는데 그는 그런 것에 대한 결핍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저 음악하는 것이 좋아서 만족하는, 70년대 하이틴영화에서의 모범생 같은 그에게서도 음악에의 열정 말고는 아무런 욕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컨대 이들은 음악을 하겠다는 열망 외에는 삶의 다른 욕망을 체념하거나 지극히 수세적으로 관망하고 있는 듯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현재 삶의 궤도가 불투명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세속의 기준에 굳이 맞추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억압은 당연히 그들의 음악으로 희미하게 분출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실제로 결성한 밴드인 메이트에 대한 아무 사전 정보도 없어서 나는 그들이 록밴드인 줄 알았다. 영화에서 그들 스스로 록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내 귀에는 약간 무거운 팝으로 들렸다. 분출하는 감정의 음악이라기 보다는 조심스레 가다듬고 흘려내보내면서 천천히 고조되는 그들의 음악은 그들의 일상적 감정의 연장이다. 감정의 억압이 음악적으로 출구를 내고 이쪽에서의 무너짐이 다른 쪽의 창조로 이어진다. 각자 격한 일상적 삶의 기복이 있으나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서로 기웃거리지 않는다. 헌일이 현재를 집까지 바래다줄 때 헌일은 현재가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를 모신다는 걸 처음 안다. 헌일과 준일의 가족사는 전혀 영화에서 알려진 바 없고 그들 각자의 연애도 은밀하게 치러진다. 헌일이 은채에게 일종의 이별 통고를 받고 준일의 집에 놀라온 날 그들은 기분 좋게 한잔 하고 자는데 새벽녘에 문득 깨어난 준일은 침대 아래 카펫에서 자고 있던 헌일이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는 걸 본다. 애인을 외국에 떠나보내고 어떤 기약도 잡지 못했던 헌일처럼 준일도 곧 애인과 그런 관계를 맞을 단계다. 별다른 말없이 준일은 헌일이 잠든 사이에 노래를 하나 만들고 피아노를 치며 직접 부른다. 준일의 노래에 깨어난 헌일이 그들의 새 앨범에 그 노래를 꼭 넣자고 말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소통방식이다. 소박하지만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음악을 통해 나눈다. 이것이 <플레이>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실제 삶이 적당히 행복해도 예술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이 고통과 결핍을 상당 부분 껴안은 창작자의 산물이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엔 파괴적인 속성과 환상의 속성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음악이 삶의 막힌 출구를 대변하는 것이면서 가상의 출구를 마련해준다고 하는 영화 속 메이트 멤버들의 삶의 양태는 당연하게도 음악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근본적 억압을 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세상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서로 할퀴고 상처를 준다. 이 영화에서 모처럼 공세적인 에너지를 띠는 후반부가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우리는 잠자코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내면은 잘 모른다. 감독이 아무리 허다한 클로즈업을 쓴다고 해도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 그렇게 사는가, 더 세게 물었더라면

<플레이>는 제작조건 때문이든, 감독의 성향 때문이든, 메이트 멤버들의 파괴와 창조의 연쇄적 궤도를 본격적으로 탐사한다기보다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스케치하는 선에서 멈춘다. 그들의 삶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조금 덜 아프고 덜 아픈 만큼 감정의 고양 폭도 그리 크지는 않다. 다만, 세상 곳곳에선 여전히 자기만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청춘이 있고 그들의 감성은 언제나 앞선 세대보단 신선하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나는 이런 점이 <플레이>의 좋은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약간은 아쉬웠다. 잔인한 말이지만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사는가, 라고 더 세게 물어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좋아서, 라는 건 평면적인 질문에 따른 답이다. 그들의 결핍의 결은 더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플레이>는 착하고 건실하고 구김이 없는 사람들이 연출과 연기를 맡아서 그들 삶의 모양대로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기교적으로는 완급이 부족해서 이를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의 젖줄이라 할 몇번의 공연장면에서 백스테이지 스토리가 갖는 긴장을 최대치로 잡아내지는 못했다. 메이트 밴드의 음악을 겸손하게 즐기는 선에서 카메라가 위치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으로도 만족하는 팬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조금만 더 셌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감상을 풀어놓으면서도 이게 감독을 포함해서 이런 유형의 예술가들이 한국에서도 두터워지는 건 아닌가, 라는 징후로도 읽고 싶어진다. 거대한 야심이 아니라 소박한 야심, 시장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버티려는 야심, 자기만의 색깔을 지키면서 무엇보다 그걸 즐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굳이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쿨하게 지내려고 하는 야심의 산물로서 메이트의 음악이나 그들의 음악적 삶을 스크린에 옮긴 감독 남다정의 연출관이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괜한 언급을 한 셈이 된다.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영화가 있을 것이다. <플레이>는 일단 요즘 곧잘 볼 수 있는 홍대 인디음악 소재의 영화들과 달리 상투형이 없고 실제 삶과 예술적 창작의 관계에 대한 도식이 없는 대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흥이 있다. 남다정의 이후 영화와 메이트의 이후 음악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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