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책장의 <영화백과사전>을 뒤적이던 열 몇살,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을 처음 봤다. 흑백사진 속, 요트에서 막 내린 그 남자는 얼마나 근사했던가. 하지만 영화를 보게 된 건 스무살이 넘었을 때였다. 1999년의 <리플리>가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했다는 얘기를 듣고 알랭 들롱의 영화를 찾아봤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리플리’는 과대망상의 대명사가 되어 <미스 리플리>처럼 드라마 제목에도 쓰인다. 결말은 제각각 달랐지만 모두 성실하던 주인공이 우연한 거짓말로 통제 불능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태양은 가득히>는 실패한 범죄로 끝나고 <리플리>는 완전범죄로 끝난다. 과대망상과 자기혐오가 교차되던 영화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힐 때, 우리는 리플리(맷 데이먼)가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요컨대 욕망은 거대한 구멍이다. 더 많은 돈을, 더 큰 집을, 더 좋은 배우자를, 더 멋진 인생을 원하는 동안 그 구멍은 놀랍게도 더 커져간다. 더 가져서 더 원하는 것인지, 더 원해서 더 가지게 되는지 헷갈리는 채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웃으며 들어간다. 이 분열증을 합리화하는 건 스스로도 믿어버리게 된 거짓말이다. 리플리가 근사하게 부르는 <My Funny Valentine>은 바로 그 거짓말이 현실을 잠식하는 순간의 배경음악이다. 멜로디만큼 아름답고 처연하고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