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40대 대표작입니다.” 오성윤 감독이 <마당을 나온 암탉>을 시작한 건 40대 초반, 완성을 하고보니 40대가 훌쩍 가버렸다. 1989년 애니메이션을 시작, 대한민국 대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오돌또기 프로덕션의 제작이사 겸 감독인 그는 원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회화를 전공한 순수 예술가였다. 대학 때 ‘미술대 연극과’라고 할 정도로 그림보다 연극 연기와 연출에 빠졌다는 오성윤 감독. 애니메이션 연출도 연극 연출을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이번 작품으로 회화의 아름다움이 대중예술과 접목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영화 한편 만들었다기보다 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지나온 과정을 돌아보며 그는 인터뷰 도중 눈시울을 붉혔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이전 오돌또기 프로덕션에선 장편애니메이션 연출을 준비하다가 고전을 한 경험이 있다.
=타격이 컸었다. 2~3년 동안 준비하던 작품이 실패하면서 사무실도 대폭 축소하고 막막했었다. 돌이켜보니 그때만 해도 내가 아마추어가 아니었나 싶다. 영화에 대한 치기어린 로망이 있었다고나 할까. <마당을 나온 암탉>을 옛날에 만들었다면 지금의 완성도에 못 미쳤을 것 같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기존 한국 장편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지점은 역시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라는 타깃층을 본격적으로 설정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을 가족용 또는 대중영화로서의 애니메이션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산업적으로나 매체의 성격으로 봤을 때 가족용,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하는 게 맞다는 깨달음이 들더라.
-<마당을 나온 암탉>은 충무로에서 여러 흥행작을 낸 명필름의 서른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공동제작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원작에 매료되어 애니메이션으로 해야겠다고 준비 중이었다. 애초 초기 개발이 끝나면 충무로의 영화사랑 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로만은 마케팅과 배급을 감당할 수 없다. 실패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심재명 대표도 비슷한 시기에 원작에 관심을 가졌나보더라. 내가 생각한 1순위가 가족영화를 많이 만든 명필름이었는데 거기서 제안이 온 거다. 내 입장으로 보면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거다. (웃음)
-명필름의 노하우가 가져온 이점은 어떤 것이었나.
=오돌또기 프로덕션이 혼자 만들었다면 놓치는 게 분명 많았을 거다. 웰메이드는 항상 경험주의적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걸 감수할 수 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게 한국 애니메이션한테 급선무다. 그러니 명필름이 지금껏 시장에서 성공해온 경험과 노하우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전 과정에 도움이 됐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데 원작이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 판단했나.
=원작은 초등학생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그 정도 깊이라면 주 타객층보다 어린이층부터 성인층까지 포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마디로 관객의 폭이 상당히 넓은 작품이었다. 소재의 파격이 주는 매력도 컸다. 창작자라면 남이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건 대중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말을 건네는데다 문제적인 결론까지 있으니 모두 마음에 들더라. 게다가 원작이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이걸로 만든다면 투자도 되고 최소 관객층도 확보할 수 있겠더라. 거기에 명필름까지 합세했으니 잘되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래도 장편애니메이션의 성공사례가 없다보니 투자는 잘 안되더라. (웃음)
-할리우드산 3D애니메이션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투자나 제작에서 좀 환영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2D를 고집한다.
=고민이 많았다. 너무 절박해지니 혼자 3D를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지금까지 함께해온 우리 팀에 대한 불신 내지는 배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를 비롯해 우리 팀 모두가 순수회화에 바탕을 두고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섣불리 할리우드 아류가 될 3D를 하느니 무조건 다른 걸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당시에 우리 팀이 노무현 전 대통령 광고를 제작했는데 디지셀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이 지금 봐도 엄청나다. 라이팅, 블러링, 버닝 등 기존 디지셀 애니메이션의 평면적인 단점을 보완해 풍요롭게 해줄 표현들을 모두 개발했다. 데모만 보고 사람들이 3D인 줄 알 정도였으니까. 이 표현들을 극장용으로 가져간다면 분명 승산이 있다고 봤다. 내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미국도 일본도 아닌 중간 지점의 한국 애니메이션이 나왔다”고 했더니 강풀이 제대로 정정해주더라. “감독님 말씀이 틀렸다. 중간이 아니라 개별의 다른 작품이 나온 거다”라고. 그걸 해낸 것 같다.
-애니메이션의 표현으로 보자면 주인공이 조류라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표정과 동작에서 포유류보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맞다. 조류는 얼굴 근육이 없다. 다 해봤자 표정이 두 가지 정도다. 어깨 라인이 없는 것도 감정 표현에서는 한계다. 그런데 애초 이 작품을 만들 때 자연주의에 입각해 의인화를 많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것도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를 반영한 결정이었다. 어찌보면 어려운 길을 택한 거다. 그런데 스스로 장애를 줘야 전혀 다른 표현이 나올 거란 기대가 있었다. 새로운 걸 하려면 오히려 장애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2D 셀애니메이션에서 배경과 캐릭터가 동떨어지는 지점들이 있게 마련인데 다양한 표현으로 이 간극을 극복해낸다. 3D에 가까운 입체적인 움직임의 포착, 빛의 활용으로 인한 다채로운 색감 등을 활용한 결과로 보인다.
=촬영의 차이다. 보통 지정된 세팅으로 촬영하는 것과 달리 컷마다 다시 설정해서 촬영을 했다. 컷의 분위기, 라이팅, 조도, 채도 등을 반영해 컷마다 새롭게 조정해서 촬영을 했다. 기존 실사영화 촬영감독과 거의 같거나 그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업이었다. 배경의 경우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옮기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의 톤 앤드 매너에 맞는 정서를 가진 배경 묘사가 필요했다. 캐릭터 역시 이렇게 만들어진 배경과 잘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기법들을 동원해서 표현했다.
-배경으로 가져간 우포늪의 묘사가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색채와 기법을 보여주는 데 일조한다.
=원래 원작은 저수지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저수지는 인공적 호수여서 자연적 조형성이 약하다. 고민을 하던 차에 우포늪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창녕에 있는 곳인데 천연 자연늪 중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더라. 계절마다 답사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잎싹이 그 풍성한 자연의 생태 속에서 뭔가 느낄 수 있다고 설정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작에 없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보조 캐릭터 수달 출몰도 우포늪에서 보고 착안한 거다. 보는 순간 아! 저 캐릭터도 넣어야겠다 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잘됐다. 아이들이 작품을 너무 무겁게만 보지 않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레이싱 장면의 스케일과 속도감의 표현력이 상당하다. 문학적인 작품을 동적인 애니메이션으로 가져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마라톤을 볼 때, 보는 이를 긴장시키는 교과서적인 연출이 부러웠다. 레이싱 장면은 그걸 참고해서 만들었다. 13분짜리 장면을 만드는 데 1년 이상 걸렸다. 아주 디테일한 콘티비디오보드를 미리 만들었다. 콘티를 짜고 스캔을 받아서 러닝타임에 맞게 편집하고 움직임을 주고, 음악까지 가녹음했다.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하나하나 미리 다 짜맞추고 간 거다. 그런 과정없이 시작만 했다간 돈과 시간의 낭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2D지만 3D의 입체적인 카메라워킹을 십분 활용했다. 물론 절대 남발하지 않는 수준에서였다.
-잎싹의 모성성이 결국 <마당을 나온 암탉>이 주는 감동 지점이자 이 영화가 추구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원작의 결론을 그대로 따랐다. 처음엔 이 파격적인 결론에 대한 반대도 많았다. 그런데 잎싹의 모성성이 초록에 대한 모성성으로만 한정됐다면 파급력이 없었을 거다. 근본적인 모성성은 이타적인 삶에 기반한다고 본다. 이건 결국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와 같다. 비상하는 초록이 형태적인 영웅이라면 알을 품어보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에서 출발해서 이종의 알을 품고, 결국 적대자의 아이까지 품어내면서 모성성을 확대하는 잎싹이야말로 더 큰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이 작품을 떠나 이 주제의식은 내게도 중요한 지침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층위의 관객을 타깃으로 한 만큼 감동의 지점도 다를 것이다.
=바라보는 관객이 많은 만큼 그걸 느끼는 층위도 다양한 것 같다. 아이는 그 정도 수준에서 보고 의문을 가지고 엄마한테 물어볼 거다. 좀 당혹스러움을 주면 어떤가. 아주 안이한 내용만이 가르침은 아니다. 할리우드 작품들의 경우 이분법적인 선악구도를 따르지만 자연스런 삶에 선악은 없다. 인간들이 조장한 가치를 어린이가 보는 영화에서 구현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세상의 삶이 간단치 않고, 사람들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어렵지만 알려주고 싶었다. 영화가 시종일관 즐거울 수도, 마냥 밝을 수만도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영화 시작 전에 아이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첫 장면부터 양계장에서 폐닭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긴장하니까 미안하더라. ‘조금만 참으면 재밌어져’라고 가서 얘기해줄 수도 없고. 대부분 그걸 극복하고 보는데, 더러는 무서워서 나오는 아이도 있더라. (웃음)
-충무로 메인 제작사와의 협업이라는 구조적 시도가 한국 애니메이션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또 새로운 계획을 세웠을 것 같다.
=이번에 경험한 것들을 계속 가져가야 할 듯하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영화사로 서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지금의 사례를 좀더 가져갈 필요가 있다. 가족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중요한 장르이자 분명 잘될 여지가 있다. 이걸 바탕으로 다음 작품도 자연주의에 입각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 환경과 생태, 미래적인 삶에 대한 화두를 꾸준히 견지하고 싶다. 이번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하려고 한다. 양계장의 가축이나 동물이 그런 화두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몸으로 겪는 문제들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