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6일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와 <인크레더블>의 브래드 버드 감독이 연출한 <미션 임파서블4> 예고편을 보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앤드루 스탠튼 감독의 신작 진도가 궁금해졌다. 제각기 잘난 픽사 작품 중에서도 특출한 <니모를 찾아서>와 <월·E>를 연출했던 스탠튼 감독은, 픽사의 보스인 디즈니사로 파견(?)나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즈(<타잔>을 쓴) 원작 <화성의 공주>를 각색한 실사 SF판타지 <존 카터>를 만들고 있다. 브래드 버드와 앤드루 스탠튼의 행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주가가 천장을 쳤을 때 실사로 진출하겠다는 심산이냐는 쑥덕거림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건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위계에 관해 케케묵은 기준을 가진 호사가들의 객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6월 중 <존 카터>의 제작 현장을 방문한 외신 기사를 일별해보니, 앤드루 스탠튼은 픽사에서 몸에 밴 버릇대로 블록버스터의 악명 높은 스트레스를 불굴의 유희정신으로 이겨내고 있는 모양이다. 살아 있는 배우와 주고받는 연출이 재미나서 중독이 될 지경인데다가, 픽셀 하나하나를 계획해야 하는 관계로 무엇 하나 거저 얻는 요소가 없었던 애니메이션에 비해 수월한 면마저 있다는 인터뷰가 팬들을 안심시킨다. 석양이 필요하면 나가서 찍으면 되고, 우연히 상점에서 발견한 의상을 영화에 가져다 쓸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그는 꽤 즐거워하고 있다(게다가 스탠튼은 디지털이 아닌 필름을 택했다고 한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의 귀재라도 대규모 실사영화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의심에 대해 스탠튼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미션 임파서블4>를 찍고 있는 브래드 버드와 그동안 밥 먹을 일이 두번 있었다. 둘 다, 우리가 감독으로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스탭들의 질문에 매번 답을 준다는 사실에 제작진이 놀라더라는 경험담을 나눴다. 그렇지 않으면 픽사에서는 무엇 하나 진전되는 일이 없으니 당연한 건데….”
7월7일
몇달 뒤 완성될 영화에 들어갈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영화에 관해 내가 아는 단서라곤 가제와 감독, 몇몇 배우의 얼굴뿐. 이야기의 배경은 지도에서는 보았지만 평생 직접 가본 적 없는 고장이다. 창밖의 끈질긴 빗소리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에 섞여들자 나의 머릿속 상상의 스크린에도 비가 내렸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음향에 귀기울이는 일, 그건 마치 문밖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정체 모를 사람의 기척을 듣는 것 같다.
7월11일
한쪽의 온전한 승리가 불가능해진 전황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임자가 바뀌는 <고지전>의 애록고지는 서사적 차원에서 보면 ‘공동경비구역’을 확장한 공간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중하고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애록고지는 중간지대이되 엄연히 전장이므로 양편이 밀고 당길 때마다 숱한 목숨이 죽어나간다. 그런데 <고지전>은-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매일 서로가 죽고 죽이고 옆의 전우를 잃는 상황에서도 남북 병사들의 명목과 실질이 분리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공적으로 내건 슬로건은 승전이지만 실제로 품은 열망은 종전인 병사들, 나아가서는 “아군이건 적군이건 어느 쪽이든 다 죽어 끝나게 해주시오”라고 신께 기도하는 청년을 상상한다. 이 지점에 전쟁을 냉소하는 반전영화로서 <고지전>의 대담함이 있고 동시에 인위성이 있다. 탈환과 점령을 무한정 반복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집단심리에 휩싸인 악어중대의 내막을 캐러온 방첩장교 강은표(신하균)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이영애)와 <플래툰>의 크리스(찰리 신)를 겹쳐놓은 캐릭터이나, 소피처럼 정교한 미스터리를 푸는 탐정도 되지 못하고 크리스처럼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목격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부대원 중 한명으로 흡수돼버린다. 전쟁이 강제한 허위의식과 인간적 상식 사이에서 분열을 겪는 병사들의 정신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싸우고 싶지 않아요”라고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소년병의 모습으로 집약되는데 여기에 영화의 테마인 <전선야곡> 합창이 더해지면 이 전쟁영화는 외압에 의해 사랑을 숨기고 위악적으로 증오를 연기하는 연인들의 멜로드라마에 위험하리만큼 근접한다.
<고지전> 전투신의 시각적 특징은, 우르르 총진격하거나 퇴각하며 화력을 한데 폭발시키는 <태극기 휘날리며>식의 압도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디테일한 밀고 당기기의 전술이 개입된 시퀀스 구성에 있다. 비탈진 지형의 특성상 병사들은 버티는 힘이 달려 굴러떨어지거나 허방 딛기를 반복하며, 부대가 진격할 때는 언덕을 기어오르는 무력한 짐승 무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정서와 호응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기우뚱한 사각(斜角)을 적절히 활용한 촬영도 교전 중 상하좌우 방위가 헝클어진 병사의 주관적 지각을 반영해 보여준다.
7월13일
할리우드 고전 모성 멜로드라마의 대명사 <스텔라 달라스>(1938)의 마지막 장면은 손수건 다섯장짜리 최루탄이다. 스텔라(바버라 스탠윅)는, 초라한 자신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유복한 환경에서 딸을 살게 해주고자 거짓말로 자식을 밀쳐낸 다음 그녀의 성대한 결혼식을 창밖에 숨어 지켜본다. 순찰하는 경찰관에게 떠밀려 쫓겨나지만 떠나가는 스텔라의 발걸음은 승리자처럼 당당하다. 오늘 본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결말은 <스텔라 달라스>의 그것을 얼핏 연상시켰다. 고전적인 감정의 ‘혈’을 건드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주인공 잎싹의 마지막 결단이 날 수 없는 운명을(그리고 모성만이 자기를 실현한 수단이라고) 받아들인 암탉이 비상(飛上) 대신 선택한 일종의 승화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진 못한다. 영화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잎싹의 번민과 거기서 비롯된 각성을 줄곧 지켜보기보다, 좀더 역동적이고 명랑한 다른 캐릭터의 일화를 좇다가 주인공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잎싹의 선택이 논리적이고 자연스런 귀결로 이해되려면, 날로 쇠약해가면서도 알 수 없는 기품이 깃들게 된 잎싹의 최종적 변모가 원작에서처럼 전달될 필요가 있는데 그 부분을 생략한 영화는 잎싹의 결단이 아들에게 전부를 걸었던 엄마의 슬픈 자포자기로 해석될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7월19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보낼 데도 없는 원고를 쓰고 있다.” 잉크 대신 위액을 찍어 쓴 문장이 즐비한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소설 <방랑기>를 처음 읽던 그날처럼,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동명 영화를 본 오늘도 통절히 반성한다. 뉘우침의 내용은 간단명료하다.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쓰고 있다. 온갖 고된 직업과 생활력 결핍된 (그러나 잘생긴) 애인들을 전전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는 <방랑기>의 후미코로 분한 배우 다카미네 히데코는 약동하는 생명력의 결정체다. 피에로마냥 처진 눈과 입매에, 삶에 대한 샐쭉한 실망과 야유를 담고 그녀는 날마다 굳세게 노동한다. 만취해서 노래한다. 유방 무게조차 버틸 수 없을 만큼 육신이 지친 밤에도 “내 인생 이게 다가 아니다”라고 증명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녀는 절대 인내하는 스토아적 히로인이 아니다. 굶주리면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국수 한 그릇 사달라 애원하는 편지를 쓰고, 혀를 낼름 내밀며 미친 듯 술을 마시고, 곤경의 막장에서도 동료 여급을 돕는다. 몸을 요구하는 편집자를 뿌리치고 여관방을 나서면서도 배달된 메밀국수가 몇판인지 흘깃거릴 만큼 그녀는 매 순간 말짱한 정신으로 100% 살아 있다. 하야시 후미코의 문장 그대로 <방랑기>의 다카미네 히데코는 “들판에 던져진 빨간 공” 이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초기에 ‘일본의 셜리 템플’로 불리던 스타였다. 일찍이 뮤지컬과 코미디에서 활약했던 생기발랄하고 유연한 배우와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수줍은 염세주의가 만나 새롭고 복합적인 차원의 여성 인물이 창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