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쭉 한번 웃고 마는 것이 전부다. 폭우를 뚫고 줄줄이 인터뷰에 응하다 보니 진이 쭉 빠진 것인가. 인사를 건넸는데도 반응이 영 신통찮다. “컨디션이 별로일 거예요. 지난주에 운동하다 어깨를 다쳤거든요.” 영화사 관계자의 말을 한귀로 들으면서 카메라 앞에 선 한은정을 지켜봤다. 예쁘다고, 정말 예쁘다고 감탄을 연발하는, 사진기자의 신통한 호의도 한은정을 그다지 움직이진 못하는 것 같다. “낯을 많이 가려요.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맘은 안 그런데. (웃음) 겉치레를 잘 못한다고 해야 하나. 고치려고 노력해서 전보다 나아지긴 했는데 타고난 성격이 그러다보니,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데뷔한 지 10년 넘은 배우가 신인배우처럼 수줍음을 타다니, 이 상황이 믿겨지는가.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2002)에서 질투심 품고 독기 뿜는 나희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선 한은정은 그동안 TV드라마에 주로 출연해왔다. <남자의 향기> <풀하우스> <원더풀 라이프> <서울1945> <대한민국 변호사> <신데렐라 맨> 등 TV필모그래피는 10편이 넘는 반면, 영화 출연작은 개봉을 앞둔 <기생령>을 빼면 <신기전>(2008)과 좀더 거슬러 <투 가이즈>(2004)까지 달랑 2편이다. “영화는 완성품이잖아요. 어설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드라마로 연기를 잘 다진 다음에 표출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선택을 주저하게 만든 건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많이 따졌어요. 심지어 흥행 여부까지도. 돌이켜보면 많이 어리석었죠. 단번에 (기회를) 잡으려고 했던 거니까.”
껍질을 깨고 홀로서기
세 번째 영화로 <기생령>을 택한 뒤 공포영화는 신인배우들의 등용문이 아니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는 한은정. 그때마다 “영화는 신인이나 다름없으니까”라고 답했을 한은정이지만 <기생령>의 서니를 받아들이면서 부담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엔 망설였어요. 공포영화에 출연한다고 하면 다들 먼저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부터 떠올릴 테니까.” <서울1945>에 출연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은정은 섹시한 도시녀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제대로 연기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 또한 매력적인 몸매의 소유자라는 가십에 가려질 때가 많았다. 고석진 감독이 <기생령>의 서니를 한은정에게 맡긴 건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성애’였지만, 그건 또 하나의 굴레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홀로서기’ 하고픈 배우로서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부담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투 가이즈>는 박중훈, 차태현 선배님 사이에 껴서 제 얼굴 알리는 데 주력했고, <신기전>이야 정재영 오빠처럼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서 가능했잖아요. 반면에 <기생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끌고 가야 하는 영화예요.” <기생령>의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아쉬움도 떠올랐다. “구미호도 속으로는 한없이 여린 존재거든요. 서니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유산의 아픔을 가진 여자이고 그 여자가 빙의된 아이를 사랑으로 되살려내니까. 그런데 드라마는 (촉박한 일정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해서 디테일한 연기를 보여주긴 어려웠어요. 시청자가 인정해준 것도 분장 등을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연기였잖아요.”
“시집도 안 간 제게 어찌나 모성애를 요구하시던지. (웃음)” <기생령>의 서니는 맨 얼굴로 속을 드러내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한은정에겐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감독님은 더 발랄한 캐릭터를 원하셨어요. 조금 더 아이스럽게, 화를 낼 때도 생각이 너무 많다며 그냥 쏘아대라고, 내뱉으라고 하셨어요.” 대사 톤을 만지고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이야 함께 조율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더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 공포영화의 특성상 “상상으로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데다 <기생령>은 “끌어올린 감정과 호흡을 유지했다가 맨 마지막 장면에 한꺼번에 쏟아내야 하는” 이야기 구조였다. 특히 서니가 아이의 몸속에 빙의된 또 다른 아이의 끔찍한 기억을 들여다보면서 경악하는 후반부 대목을 촬영할 때 한은정은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다. “순서대로 촬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장면은 (누군가의 액션에 대한) 반응으로 리액션이 나오는 게 아니었거든요.”
내일을 향해 쏴라
촬영기간 중 <엑소시스트>와 <디 아더스>를 여러 차례 돌려 봤다지만 정작 한은정을 자극한 건 상대 아역배우였다. “막상 촬영 때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아이들에게 배울 점이 많아요. 순수하거든요. 딱 고것만 해요. 몰입했다가 뒤돌면 곧바로 되돌아오죠. 계산이 없죠. 그걸 보면 부러워요. 연기는 순수함이 기본이고 테크닉은 그 뒤에 따라붙어야 하는 거잖아요.” 순수한 아이와 눈을 맞추면서 ‘백지’ 같은 연기의 기본을 깨달았다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아이와 액션장면을 찍을 때는 힘들었어요. 조금만 부딪쳐도 아이가 아파하니까. 다들 걱정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몸이 사려졌어요. 이러다간 감정이 안 나올 것 같아 나중에는 좀 과격하게 했는데, 그 뒤로 아이가 삐쳤는지 말을 안 붙이던데요. (웃음)”
시사회를 하루 앞두고 이뤄진 인터뷰, 한은정은 <기생령>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한다. 남다른 각오의 결과가 부끄럽다는 토로가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걸 보여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결심처럼 들린다. 한은정이 택한 다음 영화는 시대극이다.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 여성의 성공기, 올가을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는데, 더이상은 일러줄 수 없단다. 신작 이야길 듣고 녹음기를 다시 켰더니 “자꾸 물어보지 말라”며 자리를 뜬다. 매끈한 몸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빈틈없는 멘털을 위해서 짬나면 한강변을 걷는다는 한은정, 다음 기착지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올여름 그녀는 한강변에서 예스런 말투를 익히느라 정신없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