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대신 솔바람이 있다. 모기는 많지만 쑥불이 있다. 팝콘 대신 옥수수는 어떤가. 영화 보다 별도 따고 싶다면 정동진독립영화제에 가면 된다. 8월5일부터 7일까지 3일 동안 강원도 정동진 정동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정동진독립영화제(www.jiff.co.kr)는 여름 휴양으로는 더없는 이색 영화제다. 강릉씨네마떼끄와 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주최하는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올해로 13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피서 코스다. 내 맘대로 자리를 골라 앉고, 가장 편한 자세로 영화를 볼 수 있으니, 모든 좌석이 VIP 로열석이다. ‘세계 최초의 현금박치기 관객상’이라는 ‘땡그랑 동전상’도 다른 영화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벤트. 20편의 상영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에 마음껏 투전하면 된다. 아직도 망설여지는가. 그렇다면 낮엔 물놀이, 밤엔 영화구경, 영화 뜨는 바다 정동진에서 보내온 7개의 초대장을 열어보자.
<낙타들>
감독 박지연/HD/10분/컬러/애니메이션/2011년
사막을 건너는 여자와 우주의 벼랑에 선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새벽이면 욕망에 들떠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남자와 슬픔이나 두근거림은 잊은 지 오래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여자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연인이었던 남녀가 만나 나누는 극중의 짧은 대화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근사한 답변처럼 들린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 속에 영원에 대한 약속 따윈 들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연인들은 자신의 상상을 덧붙여 감정의 시간을 연장하는 걸까. 앵무새처럼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도망가려는 남자와 카우보이처럼 어떻게든 남자를 붙잡아두려는 여자가 엇갈린 진자처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장면을 놓치지 말 것.
<나쁜 교육>
감독 고수경/HD/23분/컬러/극영화/2010년
천사 같은 산골 아이들의 도움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난 선생 김봉두. 그가 만약 이 영화를 봤다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겠다. 시골 분교에 부임한 첫날, 선생 배승훈(허준석)은 괴물 같은 아이들 때문에 쩔쩔맨다. “이놈의 인생, 나도 이제 내려놓고 싶다”고 말하고, 부모의 성관계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시체를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미국인이 돼서 대접받고 싶다는, 철든(?) 아이들의 소망 앞에서 진땀 빼는 배 선생. 사랑으로 시궁창 같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좋은’ 선생 배승훈의 가르침은 과연 ‘나쁜’ 아이들을 제 길로 선도할 수 있을까. 과장과 허풍으로 현실의 위선을 샅샅이 발가벗기는, 한편의 사이코드라마.
<쉿>
감독 이상현/HD/16분/컬러/극영화/2011년
공무원 시험을 앞둔 혜림(김영아)은 도서관에서 B사감 노릇을 한다. 말꼬투리 잡으며 싸우는 고등학생 커플부터 부스럭거리며 빵을 먹는 남자까지, 혜림의 눈엔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공공의 적’. 그런데 싸늘한 눈총 한방이면 제압되는 이들과 달리 옆에 앉은 이 남자, 강적이다. 헤드폰을 끼고 시끄러운 음악을 방사하는 그에게 연달아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급기야 도서관에서 침묵의 육탄전을 벌이는 두 남녀,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쉿>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일상을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요리해냈다. 재 묻은 개 나무라던 혜림이 똥 묻은 개로 전락하는 순간, “원하는 것만을 보는 어리석은”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데, 그건 조용합시다의 ‘쉿’이 아니라 아뿔싸의 ‘쉿’(shit)이다.
<날강도>
감독 류현경/HD/17분/컬러/극영화/2010년
“한번 해야 하는데….” 남학생을 보면 ‘쩝쩝’ 하고 입맛부터 다시는 수연(류현경)의 별명은 ‘날강도’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곤 하는 수연의 ‘쿨한’ 연애를, 한때 그녀의 남자친구였던 민구(오태경)는 ‘찝찝한’ 눈으로 바라본다. “다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 연기하지 말라”는 민구의 조언을 듣고 수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뭇없는 사랑 앞에서 ‘징징거리고 앵앵거리던’ 과거를 떠올린 수연은 그날 밤 누구를 찾아갔을까. ‘수연과 민구의 청춘스케치’라고 이름 붙여도 그럴듯하다. <방자전>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배우 류현경이 직접 연출했다(여배우가 메가폰을 든 작품은 또 있다. '부녀지간의 소통 부재'를 다룬 구혜선 감독의 <당신>도 챙겨보자). 돼지껍데기를 우적거리고 짬뽕 국물을 후루룩거리며 ‘사랑이 변하니’라고 되묻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
<나는 2급이다>
감독 이한규/HDV/24분/컬러/다큐멘터리/2011년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장애인이 아니다. 1급이 있고, 2급이 있다. 1급 장애인은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지만 2급 장애인은 그렇지 못하다. 뇌병변 2급 장애 판정을 받은 지호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1급이 아니라 2급이기 때문이다. 밥은커녕 빵 하나 사먹으려고 해도 고난의 행군. 용변을 혼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옷을 입지 못해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빈번하다. 지호의 숨찬 일상을 더욱 옥죄는 건 바로 2급 딱지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기 전 일부러 소주 1병을 마신다는(?) 지호의 토로는 ‘함께 사는 사회’가 허울뿐인 구호임을 꼬집는다. 강릉지역 장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영화동아리 ‘바롬’ 제작.
<거북이들>
감독 구교환/HD/36분/컬러/극영화/2011년
“넌 친구도 없냐?” 교환(구교환)은 서른이 다 됐지만 방 안에 처박혀 종일 게임과 축구 시청에 골몰한다. 거북이를 싸지 않았더라면 교환의 바깥 나들이는 더욱 미뤄졌을 것이다. 동네 한의사(백성철)는 교환에게 곧 거북이로 변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 <거북이들>의 상상 연쇄는 종잡기 쉽지 않다. 거북이를 싸는 중병에 걸렸음에도 교환은 아무렇지 않게 짬뽕을 먹고, 거북이를 싸는 또 한명의 소녀(고우리)는 처음 만난 교환에게 장풍을 날린다. 후반부가 되어야 게임 같은 사건들이 한 다발로 엮인다. 툭 건드리면 머리와 다리를 숨기기 바쁜 거북이처럼 교환과 한의사와 소녀는 작은 거짓말에도 상처입고 제 집으로 또다시 숨어든다. 주성치에 빙의된 두 남자의 짧은 교감장면은 정말 웃기다.
<뻑킹 세븐틴>
감독 김현성/HD/29분/컬러/극영화/2010년
기우(정영기)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했는데 아빠 소리 듣게 생겼다. 동갑내기 엄친 딸 진아(천우희)에게 과외수업을 받다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신체검사를 받기 전까지 진아의 낙태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기우는 목돈 마련을 위해 급기야 보험사기까지 손을 댄다. ‘뻑킹’이라고 해서 우울하고 불편한 분위기의 영화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은 그 반대다. 열일곱이 풋풋한 숫자가 아니라 무기력한 숫자라고, 무기력을 방패삼아 무책임한 선택을 거듭하는 청춘들이지만 결국 그들은 열일곱의 불운을 열일곱의 기적으로 바꿔낸다. “강요된 선택 앞에서 주저앉았던 우리에게 이젠 적어도 사지선다는 주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감독의 물음은 비단 열일곱의 치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