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부터 고다르는 과학자들이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작업한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껴왔고 그런 상호성을 영화가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쿄의 과학자들은 샌프란시스코의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 자리잡는 데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다르 자신은 영화는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과학을 모델로 삼으면서도 과학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됨으로써만 비로소 ‘강력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추측했던 것 같다(과학적 작업이 과연 고다르가 생각한 바와 같은 것이냐는 여기선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 그는 영화가 예술일 수 있었던 시대는 그가 데뷔했을 즈음에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고다르가 보기에 작가주의는 영화의 과거와 (그 자신이 등장한 1960년대에 국한된) 현재를 일단 예술로서 정당화하면서 무언가 다른 미래를 불러들이기 위한 연결고리였을 뿐 미래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다르의 바람과 달리 영화가 예술로 고착된 것, 바꿔 말하면 영화감독이 작가(예술가)가 된 것이야말로 진정 영화의 비극이라 할 만한데 이로 인해 초래된 여러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화감독이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작품을 위해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는데, 굳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작품의 전후(前後)와 관련해서거나- 시나리오 초고 검토나 완성작 시사- 그도 아니면 안부를 묻는 정도다.
이상의 언급과 관련해, 2009년 겨울부터 올봄까지 조나스 메카스와 호세 루이스 게린이 주고받은 비디오-편지 모음집인 <편지들>(2011)은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편지들>이 이런 시도를 감행한 최초의 작품은 결코 아니며, 고다르적 기획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도 아니지만 두 영화인이 ‘카메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영화와 관련된 물음들을 제기하고 또 이를 실천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작품의 구성원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명목상으로만 영화-편지 교환일 뿐 실은 독백이나 일방적인 고백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던 몇몇 선행작업들과는 분명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편지들>은 영화가 무언가 다른 것이 될 수 있을지 여부를 묻기 전에 일단 편지를 주고받는 일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소박한 시도다. “군중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예술”(<파리의 우울>)이라 한 보들레르의 계보를 잇는 산책자인 게린은, 영화란 삶에 반응(reaction)하는 것이라는 메카스의 ‘공식’을 몸소 실천하고자 캠코더를 들고 뤼미에르의 촬영기사들처럼 거리를 누빈다. 이에 메카스는 뤼미에르에게 헌정한 자신의 영화 <월든>(1969)을 떠올리게 하는 형식으로 그의 현재의 일상을 기록한 편지로 화답한다. 그러자 게린은 월든 호숫가를 찾아가 그곳에서 소로적 자족성과 프란체스코적 순수함이 동시에 담겨 있던 메카스의 영화를 떠올린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편지가 이어지는데, 전체적으로는 (게린이 선배감독인 메카스에게) ‘배움’과 그 실천이라고 하는 수직적 관계가 상호적 편지교환이라고 하는 수평적 관계와 교차되는 형상을 띠고 있다. 메카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게린은 “오늘날처럼 영화감독들이 고독하고 고립된 때가 있었던지” 자문하며 고다르적 근심에 다가간다. 앞서 말했듯 이 근심은 예술로서의 영화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기에 쉽사리 해결될 순 없는 것이지만 <편지들>의 소박한 시도는 적어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준다. 그러한 근심은 영화가 편지가 되는 것으로 얼마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그 편지는 반드시 다른 편지와 교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