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그 흔한 영화제 한번 못 가보고, 여름의 대표적 문화상품으로 등극한 뮤직 페스티벌에 갈 시간도 안되었다고 슬퍼하는 독자가 있을까? 그렇다면 여름 휴가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쪽으로 틀어도 괜찮겠다. 8월11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는 역대 최고 규모인 총 101편의 다채로운 음악영화뿐 아니라 밴드 강산에, 김창완밴드, 브로콜리 너마저, 리쌍, 이승열, 국카스텐 등 뛰어난 뮤지션들의 공연이 함께 곁들여진다. 그야말로 눈과 귀가 동시에 호강할 수 있는 기회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는 당신을 위해 그중 극히 일부만을 여기 소개한다.
이것이 한국 음악영화의 최전선
한국 음악영화들의 외연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두편을 먼저 소개한다. 일단 소재 면에서 흥미를 잡아끈다. 김혜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한국영화음악의 오늘’ 부문)은 공식적 기록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여성국극의 역사를 다룬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공연계를 풍미했던, 여자들이 남성 역까지 맡으며 창과 무용, 연기를 펼치는 일종의 국악 뮤지컬이다. 수많은 소녀들이 여성국극에 심취해 패물을 훔치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공연을 몰래 보러 다녔고, 학업과 결혼과 안정된 미래를 내팽개치면서까지 배우의 길을 택했다. 뛰어난 창 솜씨, 매력적인 외모와 연기력까지 겸비했던 이 만능 재주꾼들은 무대에서만큼은 공주도 되고 왕자도 되고 칼싸움도 하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풍성한 모피코트에 댄디한 슈트 차림으로 명동 거리를 거니는 이들의 기념사진을 보라. 흔하게 거론되는 30년대 ‘모던 걸’과는 또 다르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현실적인 계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에만 모든 것을 내던졌던 놀라운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까지도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의 여성국극 다카라즈카와 비교해본다면 한국의 여성국극이 남성 위주의 제도하에서 어떤 불운을 겪었으며 어떻게 말소되어왔는지가 한층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왕자가 된 소녀들>을 보고 나면 제천국제영화제에서 여성국극 갈라 공연까지 같이 즐길 수 있으면 좋았겠다는 바람을 떨치기 힘들어진다.
현영애 감독의 <NOW, 머리에 꽃을>(‘세계음악영화의 흐름’ 부문)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김정미, 신중현 등이 한국음악계를 바꿔놓았던 그 순간을 더듬어간다. 그러니까 히피와 사이키델릭 록의 시절 말이다. 최호 감독의 <고고70>을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NOW, 머리에 꽃을> 전반부에 생생하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클럽가의 풍경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명동 클럽 OB’S CABIN, 광화문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록 밴드들이 열광적으로 목청 돋우고 10, 20대 젊은이들이 그 음악에 자지러지며 환호하던 시절, 심지어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 히식스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 창립기념일에 불려가 박정희 전 대통령 앞에서 연주한 적도 있다. 그러다 1971년 국가비상사태선언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꿈도 실패할 수가 있을까?” 카메라는 현재로 넘어온다. 과거의 흥미로운 ‘역사탐방’에서, 여전히 그 시대 음악을 사랑하는 지금 사람들에게로 넘어와 ‘히피즘이 당신에게 무엇인가, 그 시절 음악이 당신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존재조차 거의 알지 못했던 한국 히피의 역사는 이렇게,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내 사랑 뮤지션의 초상, 시규어 로스부터 메르세데스 소사까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밴드가 나오는 영화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봐야 한다. 실제 뮤지션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시네 심포니’와 ‘뮤직 인 사이트’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와 시규어 로스 보컬리스트 욘시가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규어 로스-비뜨스필룸 엔다뢰이스트>와 <욘시-고 콰이어트>는 어떨까. 미국 흑인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음악 버라이어티 쇼 <쏘울 트레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쏘울 트레인!!>, 위대한 테너 유시 뵤를링에 관한 <유시 뵤를링의 왕국>, 90cm에 불과한 키와 뼈 질환 때문에 삶의 모든 것에서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던 재즈 피아니스트 미셸 페트루치아니의 이야기 <미셸 페트루치아니, 끝나지 않은 연주>, 지난 50년 동안 브라질 음악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뮤지션 나나 카이미에 관한 다큐멘터리 <리오 소나타>, 비틀스가 가장 사랑하는 뮤지션이었던 해리 닐슨을 돌이켜보는 <위드 아웃 유, 해리 닐슨> 등도 있다. 열정적인‘말러리안’이라면 <구스타프 말러의 황혼>이 필견작이다. 구스타프 말러와 알마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19세기 비엔나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아이콘들이 탐미적인 황혼의 시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원스> 한편만으로도 오랜 세월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될 사랑을 그려낸 뮤지션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웰 시즌>(‘세계음악영화의 흐름’ 부문)이 있다. <Falling Slowly>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거머쥔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는 하루아침에 전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한다. 이제 글렌 한사드는 자신의 밴드 스웰시즌과 마르케타 이글로바와 함께 대대적인 투어 콘서트를 기획한다. 권투로 승승장구했지만 결국 꿈을 포기했던 아버지가 “네가 내 대신 미국을 정복했구나”라며 몇번이고 감격할 때 글렌한사드의 눈에 맺히는 눈물, 불과 18살밖에 안된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 명성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고민, 현실과 픽션이 엉켜들며 시작된 사랑이 결국 이별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자잘한 상처. 모든 것이 가감없이, 때로 놀랄 만큼 정직하게 카메라 앞에 드러난다. 얼마 전에 들려온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결혼 소식이 새삼 환기되면서 지극한 멜랑콜리에 잠기게 된다.
혹은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팬이라면 <메르세데스 소사: 칸토라>를 놓칠 수 없다.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소사는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시절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며 국민들이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그야말로 ‘라틴 아메리카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다. “가난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생각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난 그저 그런 평범한 가수에 그쳤을 것이다. 나는 인간에 대해, 불평등에 대해 늘 사고한다. 내가 받은 수많은 상은 노래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노래에 담긴 나의 생각에 주어진 상이다.” 2009년 숨을 거둔 메르세데스 소사가 생전에 마지막 음반을 녹음할 당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그녀의 음악과 함께 그녀의 사상을 함께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갱스부르와 들르뤼의 순간들
1960, 70년대 프랑스 대중문화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눈여겨볼 두편의 영화가 있다. 조안 스파르 감독의 <내 사랑, 세르쥬 갱스부르>(‘시네 심포니’ 부문)는 불멸의 프렌치 아이콘 세르주 갱스부르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더할나위 없이 음탕하고 달콤하고 위트가 넘치던 갱스부르의 음악을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 역시 평범한 전기물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다. 갱스부르의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중요한 부분만 겅중겅중 자유분방하게 건너뛰는 이 영화는, 당시 프랑스 대중문화의 수많은 순간들을 한꺼번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타국 관객에게 만만한 작품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청해서 노란별 표식을 가슴에 달고 다녔으며 위대한 화가를 꿈꿨던 당돌한 유대인 소년 루시앵 갱스부르가 어떻게 뮤지션 세르주 갱스부르로 재탄생하는가. 여기에는 작가 보리스 비앙, 가수 줄리엣 그레코, 아이돌 스타 프랑스 갈, 관능의 화신 브리지트 바르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연인 제인 버킨, 사랑스러운 딸 샬롯 갱스부르, 세르주의 마지막 연인 밤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간다. 그리고 이들이 아주 짧은 순간 등장하더라도, 이들이 취하는 제스처와 패션 스타일 모두 각자의 대표작이라든가 포트레이트에 등장하는 순간을 끌어들인다. 심지어 그들이 불렀던 노래가 대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르주 갱스부르와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눴던 브리지트 바르도가 그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혹은 피아노 앞에서 춤을 출 때 여지없이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를 카피한다. 세르주 갱스부르를 혼란스럽게 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양배추머리 남자’와 ‘갱스바’ 모두 생전에 갱스부르가 자신의 분신이라 일컬었던 기묘한 존재들이다. 노래와 춤, 영화와 현실, 꿈과 판타지, 인형과 인간이 뒤섞이며 빚어내는 황홀한 혼란은, 갱스부르의 음악과 꼭 닮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당장 세르주 갱스부르 앨범 전집을 구매하고 싶어진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프랑수아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 <줄 앤 짐> <부드러운 살결>, 장 뤽 고다르의 <경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올리버 스톤의 <시실리아>를 비롯해 베르트랑 블리에, 아녜스 바르다, 필리프 드 브로카, 잭 클레이튼, 프레드 진네만 등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위대한 작곡가 조르주 들르뤼의 발자취를 더듬는 <영화음악의 거장들-조르쥬 들르뤼>(‘주제와 변주’ 부문)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 탄생할때 조르주 들르뤼도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조르주는 자신의 음악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은 조르주 그 자체였다.”(프랑수아 트뤼포) 이미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열정적인 목소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멜로디를 손가락이 따라잡지 못해 악보마다 급박하게 휘갈겨 쓴 음표들이 흥미롭게 명멸한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영화음악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 <유령작가>)가 긴 인터뷰를 자청하며 자신이 들르뤼를 얼마나 닮고 싶어 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심지어 들르뤼의 자택을 방문한 다음 그의 작업실에 놓여 있던 Pleyel 피아노까지 얼른 구입했을 정도다.
음악은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한다
음악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을까? 혹은 음악이 잃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붙잡고 다시금 현재로 끌고 오는가? 여기 그같은 질문에 감동적인 대답을 들려주는 네편의 영화가 있다. 짐 콜버그의 <뮤직 네버 스탑>(개막작)은 신경정신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 올리버 색스의 원작 <마지막 히피>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페기 리의 낭만적인 노래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그레이트풀 데드에 열광하는 아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없는 건 명백했다. 음악적 취향부터 정치적 견해까지 사사건건 대립하던 아버지 헨리와 아들 가브리엘은 1967년 어느 날 그레이트풀 데드 콘서트를 둘러싸고 큰 싸움을 벌이고, 가브리엘은 집을 나가버린다. 20년 뒤 가브리엘은 뇌종양으로 뇌가 손상되어 기억을 잃어버린 채 거리에서 발견된다. 음악 치료사 다이앤은 여전히 1968년 무렵에 고착되어 있는 가브리엘이 비틀스와 밥 딜런, 그레이트풀 데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두번 잃지 않기 위하여 아들이 사랑하는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호시다 요시코 감독의 <락 어스 대디!>(‘시네 심포니’ 부문)와 시오야 도시 감독의 <스윙 미 어게인>(‘세계음악영화의 흐름’ 부문)은 모두 음악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는 나이든 남자들의 열정을 그린다. <락 어스 대디!>에서 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월급쟁이 후지오카는 지난 삶을 돌이켜보며, 인생 최고의 순간은 고교 시절 밴드 ‘coalecanths’에서 활동했을 때라는 걸 깨닫는다. <스윙 미 어게인>에선 한센병으로 인생 대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노인이 50여년 만에 다시금 용기를 내어 트럼펫을 집어든다. 자기 때문에 와해됐던 재즈 밴드를 다시 결성하고, 놓쳐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 자신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시절> <투 머치> 등으로 잘 알려진 스페인 감독 페르난도 트루에바의 이색적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세계음악영화의 흐름’ 부문)도 강력 추천한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 등장하는 나이든 거장들의 지난 삶을 낭만적으로 상상한 버전이라고 할까. 1948년 쿠바의 하바나, 위스키보단 모히토를 마셔대며 삶의 환희를 즐기던 두 청춘 남녀, 피아니스트 치코와 가수 리타가 마주친다. 서로의 음악에, 그리고 서로에 대해 강하게 매혹된 두 사람은 그러나 뜻하지 않게 기나긴 이별을 감당해야만 한다. 쿠바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의 음악, 듣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보사노바와 차차차, 삼바 명곡들이 화면을 누비며, 독특하게 감각적인 그림체를 더욱 특별하게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