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광구>에서 차예련은 석유시추선의 연구원이다. 온몸에 기름을 뒤집어쓰고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다른 대원들과 달리 점잖게 하얀 가운을 입은 박사의 모습이다. 3D 액션스릴러영화에서 몸이 근질근질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7광구>는 “비록 비중은 적어도 안성기와 하지원이라는 대선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것이 많은” 영화였다. ‘이게 우정출연이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가장 짧은 시간, 가장 많은 것을 얻어간 배우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출연하게 된 작품이 바로 ‘차예련의 재발견’이라 불린 TV드라마 <로열 패밀리>다. JK가의 가풍을 거스르고 그룹 내 다크호스로 떠오른 ‘조현진’을 연기하며 전혀 색다른 매력을 뽐냈다. 똑 부러지는 사업적 마인드와 주변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불같은 야심, 어쩌면 날카롭고 명쾌한 마스크의 차예련이 지금껏 가장 편해 보인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게 차예련은 지금이야말로 가장 멋진 자신의 모습을 펼쳐 보일 때라 생각하고 있다.
-사실 스포일러라 하기도 그렇고, 까놓고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하고 그리 오래가지 않아 죽는다.(웃음)
=다들 시사회가 끝나고는 ‘그래도 네가 뭔가 할 줄 알았는데…’ 그러시는 거다. (웃음) 영화에서 외계생명체도 배양하고 숨겨진 비밀도 알고 그러니까 뭔가 해주길 기대하셨던 거다. 사실 영화에서 빨리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열쇠를 쥐고 있는 캐릭터여서 뿌듯했다. 빨리 죽으면 그만큼 ‘왜 그런걸까?’ 하고 더 궁금해하기도 하니까. 아무튼 누가 ‘요즘 무슨 작품 하세요?’ 물을 때마다 ‘네 <7광구> 찍고 있어요’ 그러면 다들 ‘어이쿠 저런 고생 많으시겠어요’ 그랬다. 물론 그럴 때마다 ‘네, 근데 고생은 다른 분들이 하시고요…’ 그랬다. (웃음)
-영화에서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 대원과의 묘한 멜로 라인도 있다.(웃음)
=그분 정말 웃기는 분이다. 계속 보면 정이 가는 스타일이랄까. 다들 농담처럼 하지원, 오지호와의 멜로 라인보다 세다고 했다. 감독님도 “저 둘(하지원, 오지호)보다는 너희 둘이 진짜 잘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웃음)
-최근 작품들의 출연 순서는 어떻게 되나.
=지난해 <7광구>를 가장 먼저 촬영했고 이후 TV드라마 <닥터 챔프>와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를 찍었다. 가장 최근 작품이 TV드라마 <로열 패밀리>다. 편수가 많다보니 스케줄 때문에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홍보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해서 지금도 죄송하다.
-이전에 조안과 함께 <므이>(2007), 장근석과 함께 <도레미파솔라시도>(2008) 등의 주연배우로 활약하던 시절로부터 거의 3년 만의 영화 출연이다.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가 먼저 개봉했지만 <7광구>를 통해 오랜만에 영화 출연을 결심했을 때는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해보자는 생각이 컸다. 사실 그전에는 어린 나이에 주인공이면 다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영화만 고집하던 시기도 있었다. 다들 왜 그러냐고 했지만 영화배우로 각인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그게 잘되지 않으면서 마인드도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면서 배우기도 많이 배웠고.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역할의 <7광구>를 선뜻 택했던 이유는 뭔가.
=애초 4, 5회차 정도만 나가는 거였으니 사실 우정출연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나중에 계산해보니 총 23회차를 다녀왔더라. (웃음) 파주 세트장에 석달 동안여를 왔다갔다 했다. 가령 시나리오상에서 선상파티 장면에는 나오지도 않는데 그때도 갔다. 안성기, 하지원, 박철민, 이한위 선배님 등 주변에 늘 배울 수 있는 분들이 가득 해서 그렇게 가도 심심하지 않았고 즐거웠다. 물론 김지훈 감독님한테 이런 우정출연이 어디 있냐고 따지긴 했다. (웃음)
-그럼 <7광구>를 하면서 하지원, 안성기 선배의 어떤 모습을 봤나.
=이래서 하지원 선배구나, 또 저래서 안성기 선배구나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들었다. 일단 지원 선배는 매신 매컷 촬영할 때마다 콘티북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박철민, 이한위 선배가 ‘콘티북 좀 그만 봐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잘 까먹어서 놓을 수가 없어요’ 그러더라. 그런 얘기를 믿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정말 귀엽고 대단하지 않나. 안성기 선배님은 예전에 박중훈, 봉태규 선배님 등과 이루씨 뮤직비디오에 함께 나온 적 있다. 당시 난 현장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7광구> 때문에 뵀을 때 먼저 “예련아, 그때 나랑 같이 뮤직비디오 찍었잖아. 기억나?” 그러시더라. 정말 그런 말씀 한마디가 사람을 한없이 풀어주더라. 당신이 워낙 대선배님이시다 보니 ‘후배들이 내 앞에서 얼마나 어려워하고 긴장할까’ 그런 걸 알고는 불안감을 싹 없애주시는 것 같다. 앞으로 나도 꼭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로열 패밀리> 얘기를 해보자. 모두 ‘차예련의 재발견’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얘기가 너무 고마웠다. 사실 예전에도 영화와 TV드라마에 여러 편 출연했는데 어딘가 여전히 신인 같은 신선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주시는 것도 좋았다. 이전 모습보다 성숙해진 것 같아 내 연기 인생에서 확실히 어떤 전환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청률 자체가 월등히 높지는 않았는데 체감 시청률은 거의 30%라고 느낄 정도로 피드백이 많았던 드라마이기도 하다. 젊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연세가 좀 있는 분들도 좋아해주셔서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김영애, 염정아 선배님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도도하고 똑 부러지는 명문가 자제 ‘조현진’을 연기하는 게 어땠나?
=실제 나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캐릭터였다. 다들 나에게 딱 맞는 역할이라고 해주셔서 고마웠다. 실제 나와는 다른 모습이기에 ‘나 연기 잘하나보다’ 하는 뿌듯한 기분도 살짝 들었고. (웃음) 연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보는 것과 다르게 정말 내게 자연스럽지 않았고 캐릭터를 잡는 매 순간이 힘들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지금껏 해보지 않은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일단 현진을 쉽게 예상하는 것처럼 ‘악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돈에 연연하고 얽매여 살며 쿨하지 못한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라 파악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쉽게 몇억, 몇십억을 얘기하지만 그게 못됐다기보다 그 캐릭터에 딱 어울리는 현실감이 느껴져야 했다.
-<7광구>든 <로열 패밀리>든 앞으로의 모습이 무척 궁금하다.
=나 역시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연기자로서의 만족감, 뭔가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한 때가 처음인 것 같다. 올해 안에 TV드라마 한편을 더 할 것 같은데, 동시에 영화도 하고 싶다. 전에 어떤 기자분이 나에 대해 ‘대표작 하나 없이 꾸준한 배우’라고 쓴 적 있다. <여고괴담4: 목소리>(2005) 이후 거의 7년 동안 영화, TV드라마 해서 총 13작품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름 1년에 두세 작품씩 하며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계속 뭔가 갖고 싶고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기하고 싶다.
-뭐랄까, 연기자로서 어떤 확실한 나만의 비장의 무기를 갖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갖고 싶다고 갈구할 때 미리 예상하는 미래의 행복감이 정작 갖고 싶던 걸 가졌을 때 느끼게 되는 실제 행복감보다 당연히 클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 기자분이 나에 대한 칭찬을 하며 그렇게 표현해주신 게 좋았다. 그리고 내가 아직 내 옷을 완전히 다 입지 못했다고도 생각했다. 지금 내가 청바지만 입고 있는 거라면 거기에 어울리는 상의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것도 저것도 입어보고 싶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