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 감독의 2003년작 <지구를 지켜라!>는 편집증적 비평 방법(paranoid-critical method, 이하 PCM)을 바탕으로 서사의 골격을 세운다. 본래 PCM은 1920년대 살바도르 달리가 무의식적 자동기술법을 대체하기 위해 편집증의 병리적 증상에서 모티브를 따온 초현실주의의 창작 방법이다. 편집증 환자에게 개별적인 사건들은 우발적이거나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정교한 인과 관계에 놓인 것이며, 따라서 단일한 원인으로 소급되는 가설의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다. PCM에 따르면 이때의 가설은 단순히 과대망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밀도 높은 해석의 착란 상태다. 상식에 근거한 합리적 추론만으로 복잡한 세상사의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면 오히려 인과율을 극단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새로운 현실 개입의 전략도 유도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탓에 PCM은 과대망상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색다르게 해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잉 해석의 결과물을 현실에 재투입함으로써 편집증적 질서로 세계를 재편하려고 시도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PCM 집행인으로 나서는 것은 주인공 병구다. 광부로 일하다 사고로 팔을 잃고 돌아가신 아버지, 수업료를 내지 않는다고 가혹한 체벌을 가하던 선생님, 노동쟁의 현장에서 구사대에 맞아 죽은 애인, 화학공장에서 일하다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병구는 이 고통스런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의 가설을 추출해낸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외계인들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병구는 유제화학의 강 사장을 외계인으로 지목하고 복수에 나선다.
흥미로운 것은, 병구의 가설이 망상의 문턱을 넘어서 현실 세계로 침범해올 때 그 주변의 일상 사물들도 독특한 용도의 오브제로 탈바꿈한다는 점이다. 물파스와 때수건이 그런 예다. 병구는 강 사장을 납치한 뒤, 때수건으로 그의 발등 살갗을 벗겨내고 그 위에 물파스를 바른다. 병구의 설명에 따르면 물파스는 외계인을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데, 거기에 함유된 ‘말레인산 클로로페니라민’이 외계인의 신경전달 물질인 ‘트라산 크라산트메이트’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PCM의 관점에서 보자면 ‘물파스’는 병구의 과대망상을 통과하면서 소염 진통제라는 본래의 기능적 맥락에서 이탈하는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기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체의 물성과 접목된 비현실적인 기능성을 앞세워, 스스로를 낯설고 기이한 오브제로 연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물의 용도 변경을 두고 로트레아몽의 시를 인용해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것처럼”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런데 잠깐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강 사장의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미친 척 그만해.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