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에 여성들의 <패왕별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스스로 이몽룡과 변사또가 되어 아름다운 여성을 희롱하고 사랑을 나눴던 1950년대 여성국극의 남장 여배우들은 21세기 걸그룹 저리 가라 할 유명세를 누렸다. 혈서는 기본이고, 그들의 사랑을 얻기 위한 소녀팬들의 자살소동 또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의 김혜정 감독이 연출한 <왕자가 된 소녀들>은 국악계의 외면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50년대의 아이돌 여성들을 카메라 앞으로 소환해낸 다큐멘터리다. 이제는 70, 80대 할머니가 된 그녀들은 한달에 한번 열리는 ‘국극보존회’ 모임을 통해 여성국극의 위태로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년간 이들의 뒤를 쫓으며 국악 역사의 큰 구멍을 복원하려 한 김혜정 감독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났다.
-여성국극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영희야 놀자’의 팀원인 김신현경이 여성학을 공부하다 ‘여성국극’이란 것이 있다며 우리에게 짧게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여성국극 사진을 처음으로 몇장 봤는데, 너무 묘한 거다. 그러다가 2007년 가을에 허숙자 선생님이 변사또를 연기하는 여성국극 <춘향전>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목소리며 포스가 장난이 아니더라. 이렇게 매력적인 공연이 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1950년대에 여성들을 대상으로 그렇게 어마어마한 팬덤이 존재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도 조사하며 상상 이상의 반응에 놀랐다. 영화에 조금앵 선생님과 결혼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한 팬의 사연이 등장하는데, 그분은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함께 찍은 거다. 그때 예식장을 운영하는 팬이 장소를 제공하고, 단원과 팬들이 들러리로 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선생님들이 공연하시면 음식 만들어오는 건 물론이고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팬들도 있다고 한다.
-남장한 여배우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동성애적인 코드를 떠올리게 된다.
=남장 여자만의 강렬한 이미지가 있으므로 우리도 처음 촬영을 시작할 땐 여성국극 안에서 성별 정치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조사해보면 흥미롭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들을 만나고 보니 우리가 너무 굳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선생님들께 성격도 남성스럽고, 옷차림도 남자다운데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해본 적 없으시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대뜸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여자로서 남자 역할을 하는 게 자랑스럽고 좋은 거지, 왜 굳이 남자가 돼야 하냐고 하시더라. 동성애자일 거라 생각했지만 결혼을 하신 분들도 많았다. 그런 선생님들을 보며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규정하는 현재의 카테고리에 우리가 갇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학 공부는 우리가 훨씬 많이 했어도 생활 속에서 자유롭게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쪽은 선생님들이었다.
-소재가 굉장히 드라마틱한데, 굳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차용한 이유가 있나.
=여성국극을 지켜온 선생님들이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엄연히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분들인데 기록도 없이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얼굴 자체가 주는 느낌이 매력적이었다. 조금앵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남자 분장을 한 채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오셨더라. 그런 언밸런스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 강렬하고 좋았다.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여성주의 문화’라는 화두로 모인 집단이다. 나와 피소현 PD, 기획총괄을 맡은 김신현경은 대학 때 <두 입술>이라는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고 이후 여성주의 문화웹진 ‘언니네’를 만들었던 멤버다. 한동안 흩어져서 각자의 일을 하다가 함께 여성주의 문화 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에 다시 뭉쳤다. 여기에 같은 관심을 가진 영상하는 친구들- 강유가람과 유재옥- 이 합류해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를 만들었다. ‘영희’는 우리가 말 걸고자 하는 우리 세대 보통 여자들을 뜻한다.
-앞으로 계획 중인 활동은.
=팀 차원에선 이번에 다큐멘터리에 미처 담지 못한 여성국극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을 기획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미친년’을 소재로 짧은 극영화를 연출해볼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여자들을 좋아하나 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