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의 순애보 앞에 울음을 터뜨린 관객은 많다.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득거리던 골룸을 보며 프로도만큼이나 소름끼쳤던 관객도 많다.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침팬지 시저에게 압도당할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스크린 위에서 관객에게 공포와 감동과 슬픔을 전달하는 ‘디지털’ 캐릭터의 표정과 제스처는 디지털 기술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캐릭터들의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해낸 배우에게 돌려야 할 것인가? 터놓고 말하자면 퍼포먼스 캡처 연기자가 ‘일반’ 연기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오스카 연기상 후보로 지명될 수 있을까?
골룸과 킹콩, 시저를 모두 연기한 앤디 서키스는 최근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모션 캡처 슈트를 입은 배우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10년 넘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내게 ‘아, 당신이 골룸 목소리 연기를 했죠?’라고 말을 건넨다.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골룸과 킹콩을 ‘연기’했다.” 디지털 캐릭터가 담보하는 정서적인 핵심이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게서 비롯된다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배우의 ‘맨 얼굴’이 아닌 전혀 다른 생명체의 얼굴이 덧입혀졌기 때문에 종종 배우와 캐릭터가 분리되는 오해를 낳는 것이다. 서키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디지털 분장일 뿐이다.”
<가디언> 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은 앤디 서키스의 주장을 “예고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썼으며, <뉴욕타임스> 평론가 마놀라 다지스 역시 “우리는 침팬지 시저에게서 인상적인 디지털 마술만 보는 게 아니다. 정말 현실감 넘치고, 분노하거나 생각에 잠긴 캐릭터를 보는 것이다”라며 강조했다. <반지의 제왕> 개봉 당시만 해도 놀랍고 신기한 ‘기술적’ 구경거리였던 디지털 캐릭터는 이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이르러 진지한 논의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이 영화는 어쩌면 연기사에 있어서도 ‘진화의 시작’으로 기록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