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한 배짱에 놀랐다.” <에일리언 비키니>에 대한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평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한마디 평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지만 뜨거운 여름밤에 극장을 찾은 관객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8월10일 오후 7시 CGV대학로에선 오영두 감독의 <에일리언 비키니>와 함께하는 여덟 번째 시네마톡이 열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오영두 감독, 배우 홍영근과 하은정 그리고 <씨네21> 김성훈 기자가 참여한 이번 시네마톡에서는 배우들의 재치있는 입담에 시종일관 즐거운 에너지가 감돌았다.
<이웃집 좀비>에 이어 영화창작집단 키노망고스틴이 내놓은 2번째 작품 <에일리언 비키니>는 SF, 액션, 코미디, 멜로를 넘나드는 괴물 같은 영화다. 올해 7월에 열린 부천국제영화제에선 3번의 매진 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고, 앞서 2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선 대상을 수상했다. 500만원이라는 저예산을 들여 찍은 <에일리언 비키니>는 배우, 스탭, 감독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내며 스토리에 살을 붙이는 식으로 찍은 영화라 더 놀랍다.
판타스틱영화제에 왜 판타스틱한 영화가 없을까
이야기는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도시지킴이 영건(홍영근)이 우연히 괴한들에게서 미모의 여성 하모니카(하은정)를 구출하면서 시작된다. 섹시함과 가녀림을 동시에 갖춘 하모니카의 매력에 영건은 한눈에 반하지만 하모니카는 사실 종족 번식을 위해 지구로 내려온 에일리언이다. 최상의 정자를 구하기 위해 하모니카는 영건을 유혹하지만 영건은 바른 생활 사나이답게 혼전순결 신봉자다. 종족 번식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하모니카는 영건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자 그를 고문한다. 그러나 영건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하모니카와 영건의 상황이 계속해서 전복되면서 영화는 액션에서 멜로로 다시 SF로, 호러로 쉼없이 얼굴을 바꾼다.
뜀을 뛰듯 자유자재로 장르를 바꾸는 <에일리언 비키니>를 구상한 건 배우 홍영근과 감독 오영두가 지난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영화를 관람한 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홍영근의 숨겨진 복근이 드러남에 따라 더 늦기 전에 복근을 보여주는 영화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영화를 기획했다”며 오영두 감독은 장난처럼 대답했지만 사실 그들이 진짜 영화를 찍은 이유는 판타스틱한 영화제에 ‘판타스틱’이라 부를 만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복근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된다며 웃던 홍영근이 오영두 감독의 말을 거들었다. “지루한 영화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다가 나온 게 <에일리언 비키니>다. 기승전결만 놓고 배우, 감독, 스탭과 함께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면서 찍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처음 정해둔 <에일리언 비키니>의 기승전결은 무엇인지 묻는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말에 오영두 감독은 “처음 얘기는 남자와 여자가 있고, 남자가 여자한테 고통받는다는 상황 정도였다. 그런데 보통의 장르영화에서 쓰이는 관습을 다 뒤집어보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공격한다면 우리는 여자가 남자를 공격하자, 이렇게. 그럼 그 여자는 왜 공격할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에일리언이면 어떨까라고 생각이 확장됐다”고 답했다.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도시지킴이 영건과 에일리언 하모니카가 가진 캐릭터의 힘이 컸다. “어떤 면에서 영건은 히어로물의 히어로를 비틀었고, 하모니카는 에일리언 영화의 괴수를 비튼 것에서 시작됐다”고 말한 김성훈 기자의 지적처럼 정형화된 캐릭터를 전복시킨 독특함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를 꽉 붙들고 끝까지 나아가게 했다. <에일리언 비키니>에서 기존의 에일리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는 하은정은 하모니카의 캐릭터를 잡으며 꽤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에일리언 이미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꽤 있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정은 어떤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없어서 처음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1차원적이고 유치한 아이디어뿐이었다. 그래서 무얼 하려 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왜냐하면 무얼 하든 인간의 상상이나 기준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게 외계인 같든 외계인이 아니든 관객의 판단에 맡겼다. 관객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미리 막거나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두 배우와 스탭 그리고 감독까지 모두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상황을 만들며 하는 작업은 처음이라 우여곡절도 많았다. 고생하면서도 계속 같이 작업을 하는 이유를 묻자 하은정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작품의 내용, 노출의 여부보다 오영두 감독이랑 작업하면서 소통하는 게 좋았다. 같이 작업을 하고 나면 내가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또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 천천히 가고 시작은 미미했지만 열심히 하면 보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최소한의 투자로 끌어낸 최대치의 결과물
저예산으로 찍은 작품이다 보니 <에일리언 비키니>의 촬영은 몇개의 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좁은 방 안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적은 자본과 최소한의 힘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하며 최대치를 이끌어낸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로드리게즈 같은 사람들이 단돈 500만원으로 장편을 찍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우린 왜 못하나 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신기했다”고 칭찬을 더했다. 현재 키노망고스틴은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을 가지고 세 번째 영화 <영건 인 더 타임>을 촬영 중이다. 차기작 <영건 인 더 타임>은 SF탐정물로 역시 홍영근이 주인공이다.
관객과의 대화로 넘어가자 재밌는 질문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한 관객이 “영화 중간에 삽입된 롤렉스 시계 광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오영두 감독의 답변이 흥미롭다. “편집하는데 그 지점(광고가 삽입된 부분)만 되면 지루하더라. 문득 케이블 채널을 보니 프로그램 도중 광고가 나와서 나도 광고를 넣었다. 이게 잘만 되면 협찬까지 되지 않을까란 무리수였다. 근데 모 시계회사에선 자기네 이미지를 쓰지 말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웃음) 그래서 한 단계 더 승격시켜 롤렉스 광고를 넣었다. 사실 특별히 시계 광고를 넣은 건 전체적으로 시간에 관계된 영화라는 걸 살짝 보여주려고 한 의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치 넘치는 그들의 영화처럼 오영두 감독과 두 배우는 “좋으면 좋다 소문내고 싫으면 싫다 욕도 해달라”며 관객에게 장난 섞인 부탁을 건넸다. <에일리언 비키니>의 가장 큰 장점은 저예산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날 시네마톡의 마지막을 정리한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스토리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나 억압이 없는 게” <에일리언 비키니>가 그토록 주목받고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