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에서 유준상을 만났다. 유준상이 연기한 영화 <북촌방향>의 주인공 성준이 걸어다녔던 그 길을 좇아서 촬영지를 선택했고 차례로 돌아다녔다. 사람 많은 휴일이라 시선도 많고 복잡함도 더했지만 유준상은 흔쾌히 즐겼다. 재동삼거리에서, 정독도서관 옆길에서, 한옥집 사이에서, 층층계단 사이에서 그는 즐거워했다. “영화 속 장소를 이렇게 다시 돌아다니다니. 기분이 정말 좋네요.” 북촌의 이 남자는 <북촌방향>을 정말 흥이 나서 찍었던 것 같다.
홍상수 감독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해도 유준상은 주목할 만한 배우였을 것이다. 그가 홍상수 영화 이외의 작품들에서 이룬 현재의 성취가 그 점을 말해준다.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자타가 공인할 만한 유쾌하고 정감있는 양식적 인물을 살아냈고 <이끼>처럼 장르적 연기가 발동되어야 하는 순간에는 그에 걸맞게 넓은 스펙트럼을 오가며 활동력을 입증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는 세심한 감정을 더없이 무감한 표정으로 표현했다. 그 밖에도 그는 여전히 바쁜 일정을 보내는데, 내년 8월에 개봉할 <비상: 태양 가까이>의 촬영을 완료했고 오랫동안 막역하게 지내는 친구 민병훈 감독의 새 영화 <터치>도 현재 촬영 중이다. 게다가 그는 명실공히 뮤지컬 공연계의 스타이기도 하다. 이 작품들의 면면만 놓고 보아도 유준상은 다방면의 재능있는 배우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주목을 넘어서 중요함을 거론할 만한 배우 중 하나가 됐다. 그의 배우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라 할 만한 홍상수 감독과의 조우에 의해 그 차원에 들어섰다. 그건 홍상수라는 명성과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유준상이라는 배우의 감각을 깨울 수 있는 홍상수라는 좋은 계기를 만났다는 뜻에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그리고 <북촌방향>
첫 시작은 신기했지만 섭섭했다. “<해변의 여인> 오디션을 계기로 만났다. 못 먹는 술을, 그것도 낮술을, 백세주 네병을 나눠 마셨다. 네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는데 그러고 나니 스탭이나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한 배우는 처음이다, 캐스팅된 거나 마찬가지다, 했다. 그 다음날 <해변의 여인> 누구누구 캐스팅, 이라는 뉴스가 떴다. (웃음) 그런데 그 오디션 자체가 내게는 충격이고 자극이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그렇게 많이 한 적이 없었다. 발가벗겨진 느낌?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인가 보다 싶었다. 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멀리 보고 조바심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왜 그랬냐고, 지금도 감독님께 곧잘 물어본다. 그러면 감독님은, 아, 왜 또 그 이야기를 꺼내, 하고 허허 웃기만 하신다.” 다시 연락이 온 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였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할 수 있겠냐고 했다. 곧장 제주도로 갔다. 주어진 모든 신이 다 끝났을 때인데,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제주도 밤하늘을 보는 내 몸의 온 세포가 다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몸이 이렇게 힘든데 이 행복감은 뭐지? 감독님께 다음 작품에도 출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은 더 강조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심하게 들이대는 것처럼 보여 안 좋을까봐 오히려 마음보다 약간 숨기면서 말했다.” 그 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유준상은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 <하하하>의 주연 중 한명이 됐다.
<하하하>의 촬영 당시 일찌감치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유준상이 현장을 더없이 즐길 뿐 아니라 그의 연기 또한 전에 없는 발군의 실력이라고들 했다. 통영의 <하하하> 현장에서 만난 유준상은 우울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듣는 사람에게 그건 꼭 그가 맡은 우울증 환자이자 영화평론가 중식이 재밌어 죽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에 와서 물으니 걱정도 있었던 것 같다. “속좁아 보일까봐 분량은 물어보지 말아야지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커플(유준상-예지원)의 분량이 안 나오더라. 안 그러려고 해도 아침마다 나오는 대본이니 분량을 매번 느끼게 되지 않나. 한 3일 정도가 안 오더라. ‘너 혹시 우리 커플이 지금 3일 동안이나 콜 못 받고 있는 거 느끼고 있는 거니?’ 그렇게 지원이에게 물었더니, 천진난만하고 착한 지원이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라고 하더라. (웃음) 그러다 찍은 장면에서 내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꽈당 넘어진 거다. 감독님이, 준상아 많이 아프지, 하시기에, 예 조금 아픕니다, 했더니 그래서 내가 한의원에서 침 맞는 신 준비했다, 고 하셨다. 한의원 가서 침 맞으면서 너희들이 서로 미안하다고 하면 너희들 신이 풀릴 것 같다고. 정말 그러고 나서 풀렸다. 그런 것들이 재미있는 거다. 내가 만약 그 순간 안 넘어졌으면, 아니면 감독님이 그것 말고 다른 테이크로 가겠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외에도 <하하하>의 저 유명한 장면. 친척 어르신을 앞에 두고 “나는 길 잃은 강아지 같다”며 “저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며 방바닥을 뒹굴고 안경이 휘어질 때, 라스트신에서 “내 천사새끼”라며 사랑을 표현할 때, 유준상은 전에 없이 새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멈추지 않았고 내처 <하하하>의 중요한 주인공 중 한명에서 <북촌방향>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했다.
홍상수 영화의 자연 중 하나가 되다
<북촌방향>은 유준상이 연기하는 인물 성준을 중심으로 시간이 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유독 그의 세포들을 더 두들기고 깨울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북촌방향>의 촬영 초반에 본 유준상은 설정에 따라 수척하고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현장을 찾은 손님들이 도대체 오늘은 뭘 찍은 거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에는 묘한 자신감과 흥분이 실려 있었다. “아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알 겁니다.” 아마도 극장에서 많은 이들의 웃음을 끌어낼 장면이 될 것인데, 전직 영화감독 성준이 술자리에서 함께 어울렸던 영화과 학생들에게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도망가는 장면을 찍은 날이었다. 물론, 정말 “도망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웃음)”. 주인공 성준이 술자리에서 동석자들에게 세상의 실체에 관하여 일장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유준상이 아침에 전해 받은 분량은 글자가 가득 찬 A4지 아홉장, 대사만 세장. “삼십 몇 테이크까지는 기억을 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을 못한다. 그 신 찍고 도망가고 싶었다. 아… 그런데 그걸 재촬영한다고 하더라. (웃음) 속으로 그랬다. 도망치면 안된다. 이걸 이겨내야 한다.” 아침에 시작한 촬영은 밤을 넘겼고 새벽을 지나 다음날 정오가 되어 끝났다.
홍상수 영화에 안착해온 유준상의 행보는 그렇게나 성실하고도 집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매번 다른 즐거움을 느껴왔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되풀이해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하하> 때 유준상이 홍상수 감독 영화에의 출연을 고집하자 소속사는 만류했다. 그가 회사를 설득했다. “배우로서 너무 행복하다. 매우 신기한 체험을 많이 해서 나도 모르는 걸 발견하게 되고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보다 더 행복한 게 있나.” 같은 감독과 연달아 찍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우려 따위도 없다. “그런 건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유준상은 이미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그러니까 <북촌방향>의 다음 영화 <다른 나라에서>의 출연까지도 마친 상태다. “이 선생님이 그러시더라(<다른 나라에서>에 출연한 세계적인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두고 배우와 스탭들은 친근한 농담 삼아 한국식 호칭으로 ‘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자신도 클로드 샤브롤 감독과 열 작품 넘게 같이 했다고.” 사람들은 김상경, 김태우와 함께 이른바 홍상수 영화의 근작을 주도하는 남자배우의 새로운 계열을 유준상이 이루었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들 말한다. 그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도의 양식적 연기에 매진하는 배우들도 있다. 흔히 메소드 연기라는 것도 그것의 일종이다. 그때 강조되는 건 몰아와 집중으로 존재를 탈바꿈하는 것이다. 어쩌면 유준상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홍 감독님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냥 엄청난 몰입이다. 생각을 안 하게 만드니까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나중에 보면 언제 이렇게 했지, 하고 기억이 안 난다. 일단 하고, 그러면 끝나고,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너무 좋은 거다. 내게는 그게 너무 재미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유준상이 지금 말하는 무아지경은 양식적 연기의 능숙함과는 다른 것이다. 적어도 홍상수 영화에서는 일정한 목표치의 인물상을 정해두고 그것에 완전히 이르기 위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배우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로운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이들이 좋은 배우다. 그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과 자연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유준상은 문득 “<하하하>의 그 바람이 가장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촌방향>의 눈, 현장 대본에 눈이 내린다고 쓰여 있고 그걸 연기할 때 정말 내리던 그 눈이 가장 신기하고 아름다웠다”고도 했다. 홍상수 영화의 좋은 배우들의 연기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들의 연기는 비나 눈이 그러한 것처럼 영화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분위기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때 그들은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바람이나 눈의 동격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이 중요하다고 로베르 브레송은 말했다. 홍상수 영화에서는 자연스러운 배우를 넘어 자연이 되는 배우가 중요하다. 바로 유준상이 홍상수 영화의 애틋한 자연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