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은 크리스토퍼 놀란 등이 주도하는 복잡한 플롯의 블록버스터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일련의 영화적 경향 모두에 과감히 ‘No!’를 외치면서 새로운 진화의 시작을 알린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플롯의 힘을 믿는 <진화의 시작>은 고전영화의 서사적 문법에 가까이 있다. 루퍼트 와이어트는 <혹성탈출> 시리즈의 기원이 된 외상적 사건, 즉 어떻게 원숭이는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나, 하는 기원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대서사시(epic) 형식의 영웅 신화를 창조한다. <진화의 시작>은 조셉 캠벨이 제시한 바 있는 영웅 신화의 공식에 입각한 단선적인 메인 플롯과 제한적인 서브 플롯에 의존하는 간결한 서사적 흐름을 갖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스토리는 결코 빈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저의 다양한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비롯된 풍부하고 섬세한, 때로는 격정적인 감정 표현은 그에게 대사서시 특유의 영웅적 면모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고동치게 한다.
앤디 서키스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완벽한 조합
<진화의 시작>은 시저를 통해 그 어떤 디지털 캐릭터도 성취하지 못한 감정 표현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대서사시 영화를 계승한) 블록버스터에서 사라지고 있던 (비록 그것이 인간의 것은 아니라 해도) 인물(캐릭터)의 다채로운 얼굴 표정을 스크린의 중심에 (재)위치시킨다. <진화의 시작>은 사건보다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각인된 시저의 얼굴을 중심으로 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이는 이 작품이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혹성탈출4: 노예들의 반란>(그리고 <혹성탈출3: 제3의 인류>)과 비교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혹성탈출4…>는 노예로 전락한 원숭이들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묘사하지만, <진화의 시작>은 유사한 상황을 짧게 묘사한 뒤 이에 대한 시저의 감정적 반응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즉 <진화의 시작>은 서사가 방향 전환하는 마디마디마다 그 상황을 반영하는 시저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지닌 정서적 호소력으로 관객을 설득하고 서사를 추동하려 한다. 시저는 수화로 전하는 몇 마디 대사 등을 제외하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지만, 그의 얼굴(몸)을 통해 표출된 풍부한 감정 표현은 이러한 제약을 너끈하게 넘어서버린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 배우가 갖던 정서적 호소력처럼. 최근, 캐릭터가 자신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면서 (얼굴 표정과 몸짓 등의) 감정적 제스처만으로 이처럼 관객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영화가 과연 또 있었는가?
영화 속 실제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단선적이고 빈약하게 비칠 정도로, 시저는 때로는 미세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자신의 얼굴(몸)에 거의 완벽하게 새겨 넣는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시저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으로 유명해진 앤디 서키스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조합으로 실현된 것이다(이에 대한 설명은 <씨네21> 817호, 김도훈과 듀나의 글을 보라). 시저의 풍부한 감정적 표현은 디지털 이미지로 창조될 수 없는 감정을 인간의 연기로 보완하고, 인간의 표정으로 담아낼 수 없는 감정적 표현을 디지털 이미지로 보완하면서, 달리 말해 인간과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서로에게 안경 같은 ‘보철 기구’로 작용하며 완성된 것이다.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를 두고 그것이 앤디 서키스의 연기인지 디지털 이미지로 (재)창조한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다. 시저의 연기를 보며 앤디 서키스라는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는 것은 누군가의 안경이 멋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앤디 서키스는 그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보철 기구일 뿐이다(이는 그가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치 내가 안경 없이는 흐릿한 세상밖에 볼 수 없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원본 없는 캐릭터’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만으로 <진화의 시작>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화의 시작>의 디지털 캐릭터가 그 이전의 것들과 구분되는 것, 그리고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감탄스러운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합작으로 다양한 감정적 표현을 성취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도록 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매개적 성격이 사라진 채로 시저(의 풍요로운 감정)와의 투명한 만남을 가능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즉, <진화의 시작>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가시성과 싸운다. 그리고 그 승리의 대가가 관객과 시저의 투명한 만남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매체)가 출현하면, 관객은 영화의 내용이나 인물을 투명하게 만나기보다는 그 테크놀로지 자체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우리는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로부터 포착된 대상을 즐기지만, 시네마토그래프가 출현했을 무렵의 관객은 대상을 복제할 수 있는 카메라의 능력 그 자체에 매혹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진화의 시작>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그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디지털 테크노로지 시대의 ‘새로운 (비가시적) 얼굴’과 조우한다.
초기 영화감독과 이론가들은 포토제니(또는 벨라 발라즈의 관상(physionomie)), 즉 촬영된 사물에 정령과도 같은 어떤 특질이 덧붙여지는 순간, 또는 그것을 드러내는 카메라의 능력에 빠져들었다. “하나의 얼굴은 결코 포토제닉하지 않다. 그러나 가끔씩 감정이 포토제니를 만든다”라고 말했던 장 엡스탱은, 마치 얼굴이 단 한번도 읽힌 적이 없는 것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얼굴을 읽으며, 그럼으로써 얼굴로부터 하나의 진리, 혹은 진리 자체를 해방시키는 능력에 매혹되었다. 하지만 사물들의 외양적 재현 속에서 그 정신적 특질이 증대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복제’에 대한 것이었다. 즉, 찍힌 이미지가 모델의 현존을 보증하는 지표(index)적 관계의 포토제니. 반면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영화는 복제된 이미지, 즉 ‘찍은 이미지’가 아닌 ‘그린 이미지’에 가까이 가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관습적으로 영화를 찍는다, 라고 표현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영화를 ‘찍는 시대’에서 ‘그리는 시대’로 거대한 전환을 이끈다. 사진과 함께 태동한 기계적 이미지는 회화적 이미지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며 ‘그리는 이미지’에서 ‘찍는 이미지’(복제)의 시대로 이끌었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영화로 하여금 다시 그 이전 시대로 회귀할 것을 요구한다(지금의 영화는 그리는 이미지를 계승했던 애니메이션과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셈이다).
‘찍은 이미지’가 아닌 ‘그린 이미지’에 가까이
어쩌면 배우의 포토제닉한 얼굴은 오라(aura) 없는 예술로 태어난 영화가 갖는 자신만의 오라였고, 이는 전환기를 맞은 영화의 마지막 남은 포토제니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영화 속 풍경과 사물의 포토제니를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찍힌 것 위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너무 많은 것들이 덧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만추>의 그려진 안개처럼). 배우는 늘 자신과 동시에 타인(등장인물)을 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 위치에 존재해야 했지만, 원본 없는 시저는 즉각적으로 등장인물이 되고, 때문에 이러한 이중성에서 오는 긴장과 모호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긴장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보급과 함께 테크놀로지와 보철 기구(가령, 앤디 서키스)간의 관계로 전치되었지만, <진화의 시작>은 그 흔적마저 지워버리고 한없이 투명한 캐릭터의 감정을 전달한다. <진화의 시작>은 보이는 얼굴 뒤에 숨어 있던 보이지 않는 얼굴, 달리 말해 벨라 발라즈가 맨눈이나 일상적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표정(감정)의 세계를 드러낸다고 여겼던 무성영화 시절의 얼굴을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되살려낸다. (릴리안 기시에게 여전히 연정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는 모욕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시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릴리안 기시다. 말 그대로, ‘원본 없는 인물’의 포토제니는 그렇게 시작되고… 진화 또는 퇴행의 서사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