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정려원] 저, 성장하고 있나요?
2011-09-08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통증>의 정려원

5년 전 정려원을 인터뷰한 적 있다. <B형 남자친구>로 데뷔했을 때였다. 가수 려원을 버리고, 배우 정려원을 택한 그녀의 선택을 쾌조의 스타트였다고 말하긴 어렵다.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동료들과 함께 축하 인사를 나누는 대신 정려원은 곧장 헬스장에 가서 1시간40분을 말없이 뛰었다고 했다. 그 까닭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출연장면이 대거 편집됐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속상함을 드러내는 무덤덤한 말투에 놀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정려원은 이렇게 말했다. “숨은그림찾기죠. 저도 제 얼굴 찾느라 진땀 뺐어요.” 인터뷰 말미엔 하고 싶은 거 해야 늙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조언 겸 다짐까지 정려원은 덧붙였다. 그게 그냥 내뱉은 약속은 아니었다. 술 마시면 헐크로 변하는 여대생(<두 얼굴의 여친>), 봉두난발 머리하고 방 안에서 별 헤는 소녀(<김씨표류기>), 사람 잡아먹는다는 빨갱이 앞에서도 큰소리치는 아가씨(<적과의 동침>) 등 그녀가 만들어낸 갖가지 캐릭터 안에는 남들이 뭐라해도 제 길 가는 의지 또한 담겨 있었다. <통증>의 동현도 다르지 않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대신 누군가의 의지가 된다. 그 의지가 자해공갈을 밥 먹듯이 하는 남순(권상우)의 입에서 쌍욕 대신 사랑의 말을 토하게 만든다. <통증>은 배우 정려원의 의지가 실현됐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품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5년 전 그녀의 의지가 여전히 진행형임을 일러주는 표식 같은 영화다.

-기자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봤어요?
=기술시사할 때 봤어요. 그런데 그때는 다들 ‘아 오랜만이야’ 하는 바람에. 사실 스탭들 보는 재미에 들떠서 영화를 제대로 못 봤어요.

-오늘 반응은 어떤 것 같아요?
=(기술시사에서) 스탭들은 한 분도 웃는 이가 없었어요. 오늘 관객이 웃는 소리 들으니까 우리만 재밌었던 건 아니구나 (안심)하는 거죠. 범노(마동석)가 남순에게 “아이구 우리 남순이 이제 잘 먹어야지…” 하면서 선짓국에 소금 이만큼 쏟는 장면 있잖아요. (기술시사회 때) 너무 웃겼거든요. 짠하면서 웃기잖아요. 혼자서만 키득키득해서 ‘내가 웃음코드가 남들과 다르구나’ 그러고 말았는데.

-곽경택 감독과는 첫 작업이었는데요.
=배우 정려원보다 사람 정려원을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분이라서 완전 반했어요. 사실 선입견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 경우에 여성스럽고, 차가울 것 같고, ‘흥’ 하고 돌아설 것 같다고들 하시는데. 어쨌거나 이미지로 캐스팅을 하지만 감독님은 이미지만 소비하는 감독님은 아니었어요. <통증> 보면 제 연기가 좀 ‘날것’ 같지 않아요? 사실 안 쓰실 거라고 생각했던 컷들이 거의 다 나왔어요. 극중의 동현은 진짜 제 모습이거든요. 정제되지 않은. 그래서 사실 좀 두려워요. 이 기분 아시겠죠? 저를 보여줬는데 거부당하면 좀.

-실제 정려원의 모습을 대중은 모르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인가요.
=빨래를 발로 집을 때 으짜, 으이씨 하는 장면 있잖아요. NG라고 생각했는데. ‘깜짝이야’ 하는 대사도 테스트 촬영할 때 ‘땀딱이야’라고 잘못 말했는데, 그 뒤의 것을 쓰시지 않고 그걸 그냥 쓰셨어요. 집 안에서 남순과의 에피소드 장면들은 저의 일상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한번은 목소리가 너무 잠겼는데도 괜찮다 그래서 ‘아 진짜요?’ 그런 적도 있어요. 동현은 정려원에다가 혈우병 환자라는 외피를 씌운 것뿐이에요. 걷는 것도 하나도 고치지 말라고 하셨어요. 코 훌쩍거리거나 머리 흔드는 것까지도. 머리 손질을 잘 안 하니까 제가 이렇게 머리를 흔들거든요. 그런 버릇까지. 근데 저를 모니터로 보게 되니까 느낀 것도 있어요. 제가 좀 산만해요.

-곽경택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과 작업할 때 많이 열어두고 가는 편 아닌가요.
=제 대사 중 어떤 건 애드리브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사전에 철저하게 다 체크하시는 편이에요. 감독님이 먼저 검토를 하니까 애드리브라고 보긴 어렵죠. 그보다는 호불호가 강한 편이라 되레 연기하기가 좀 편했어요. 이건 어때요 하면 “응, 그건 아이다”. 이건 어때요 하면 “좋다. 한번 해봐∼라”.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중간은 없어요. 아, 그리고 감독님 컷 소리. 맘에 들면 “커어어어헛!”이에요.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촬영 때 따서 벨소리로 쓴 적도 있어요.

-포스터만 보면 극중 동현이 굉장히 연약한 캐릭터처럼 보이는데요.
=아픈 사람들에 대해선 편견이 많아요. 성격이 까칠해서 ‘내 곁에 오지 마’ 하는. 처음엔 저도 동현이 온몸에 가시가 돋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실제 혈우병을 앓고 있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게 아니에요. 만나면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느낄 정도로 굉장히 밝아요. 예전에는 제 안에서만 뭔가를 자꾸 찾았는데, 그래서 한계를 느끼곤 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게다가 동현의 고통 부분은 다 들어냈어요. 남순과 동현 양쪽으로 고통이 나뉘면 힘이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동현을 보면 “쟤, 아픈 애 맞아?” 싶을 거예요.

-동현의 표정이나 말투는 한 장면 안에서도 자주 바뀌는데요. 그게 인물을 풍성하게 보여주는 자신만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해요.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도 보디랭귀지를 많이 해요. 제가 표현주의자예요. 내성적이지만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그림이든 연기든 뭐든. 사람들이 제가 이야기할 때 무슨 만화 보는 것 같다고 하죠. 그런데 정확히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몰라요. 남순의 집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표정도 감독님이 잡아내신 거예요. 성향테스트 같은 거 해보면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느낌으로 결정하는, 뭐 충동적인 성격이에요. 무조건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죠. 어느 정도 받고 정리하고 판단하는 쪽이 아니라.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는 것 같고.

-영화만 놓고 보면 <B형 남자친구>부터 지금까지 연기 못한다고 욕 먹은 적은 없을 것 같은데.
=제가 출연한 작품들을 많이 안 보셔서 그래요. 제가 지금까지 거절한 건 다 잘됐어요. 그래서 가끔은 거절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 했는데, 그게 잘 안되죠.

-거절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뭔가요.
=제가 먼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감을 해야 표현을 하는 것이고. 왜 퍼포먼스라고 하잖아요. 전 그거 못해요. 상우 오빠도 비슷한 거 같아요.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저는 연기 바로 직전에 상대배우와 다퉜다고 하면 그게 연기에 나타나요.

-<통증>까지 4편의 영화를 찍었는데요. 데뷔 때는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 있을 것 같네요.
=현장에 가면 배우가 스탭들에게 전해주는 에너지가 있어요. 그게 다시 스탭들을 통해서 배우에게 전해져 와요. 그게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다 안고 가야 해요. 흡수하고, 반사하고, 반복이죠. 그 순환을 느끼는 것이 재밌어요. 그게 공감일 테고. 흔히 사람이 남는 영화가 있고 영화가 남는 영화가 있다는데 <통증>은 제게 둘 다 남은 영화예요. 전 주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라 이전엔 제가 편지를 써서 줬는데, 이번엔 정말 편지를 많이 받았어요. 이런 게 누리는 거구나 싶었어요.

-지나온 길만큼 앞으로의 길도 잘 보여요?
=전∼혀 안 보여요. 이번엔 이런 것을 했으니 요번엔 요런 것을 해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편이 아니에요. 징검다리 하나씩 놓으며 앞으로 가는 거죠.

-엄태웅씨와 촬영 중인 <네버엔딩 스토리>의 캐릭터는 어때요.
=사람들이 흔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정려원이에요. 조사하고, 준비하고, 포스트잇으로 스케줄 정리하고, 따박따박 따지기 좋아하는 은행 직원.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고객님∼.” 여태껏 한 캐릭터 중 저하고 가장 멀어요. 오늘 인터뷰 끝나면 밤에 부산 가서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해야 해요. 제가 감독님한테 그랬다니까요. “제가 태웅 오빠 것 하면 안돼요?” 라고. 그런데 하나만 물어볼게요. 저 전보다 성장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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