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아저씨 사진 정말 멋져요! 아니 하정우 형인가?” 스튜디오의 벽을 가득 메운 배우들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박지빈의 시선이 하정우에게 머문다. 대선배처럼 느껴지는 남자배우들을 보면서 아직 아저씨라고 해야 할지, 형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설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나 그를 보는 우리에게나, 박지빈은 여전히 ‘아역배우’라는 공고한 틀 안에 있다. 하지만 어느덧 17살이 된 그는 올해 검정고시를 통과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다. 유승호보다 두살 어린 그는 최근 ‘폭풍성장’이라는 표현과 함께 포털 사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훌쩍 자란 키, 말하는 모습이나 웃음에서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한결 성숙해진 모습이다. <안녕, 형아>(2005)에서 세상 무서울 것 없던 말썽쟁이 9살 한이의 모습은 이제 한참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또 한명의 ‘잘 자라줘서 고마워’ 배우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10년차 배우요? 숨고 싶어요
“삶도 죽음도 자연의 한 조각이에요.” 영화에서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은철(박지빈)은 자신을 걱정하는 동네 형에게 그렇게 얘기한다. 저런 대사가 과연 그에게 어울릴까 싶지만 딱히 어색하지 않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 이제 그에게 남은 혈육이라곤 매일 떼만 쓰는 동생 은하(이슬기)밖에 없지만 그는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속에서는 수시로 울컥하고 세찬 소용돌이가 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오직 동생 하나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은하가 한번도 본 적 없는 고래를 보러 가자며 또 떼를 쓰기 시작한다. 은철이 재래식 화장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을 보고 있는 와중에도 사정없이 문을 열어젖힌다. 하지만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은하를 위해, 그러니까 은하의 눈이 멀기 전에 고래를 보여주기 위해 고래를 볼 수 있다는 장생포까지 둘만의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다. 그렇게 박지빈이 믿음직한 오빠가 됐다.
<안녕, 형아>에서 아픈 형을 매일 괴롭히는 것은 물론, 그런 형이 구토를 하고 쓰러지면 “형도 학교가기 싫어서 아픈 거지?”라는 생각밖에 못하고, 심지어 입원하며 머리를 밀어버린 형에게 ‘빡빡머리 형아’라고 놀리던 그가 이제는 아픈 동생을 돌봐주는 오빠가 된 것이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고 말하는 <안녕, 형아>는 <고래를 찾는 자전거>와 비교하면 그런 변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는 누나가 있고 동생이 없어서 ‘오빠’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잘 적응이 안 됐어요. 지난해에 드라마 <별을 따다줘>에서도 동생이 있긴 했는데 여전히 어색하고 조금 힘들어요. <안녕, 형아> 때는 내가 떼를 쓰는 역할이었는데 그게 바뀌니까 이상한 것도 있고. (웃음) 그렇게 촬영 내내 ‘오빠는 이런 모습일 거야’라는 생각만 했어요”라는 게 그의 얘기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는 사실과 별개로 가끔 TV에서 방영되는 <안녕, 형아>를 다시 보지는 못했단다. “그럴 때마다 ‘지금 TV에서 하고 있는데 잘 보고 있다’는 연락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막상 저는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한번도 다시 본 적이 없어요. ‘왜 저렇게 못했지’ 그런 생각만 들거든요. 그러고 보면 영화건 드라마건 스스로 만족하고 그러는 일이 잘 없어요. 그러니 주변에서 ‘연기 10년차’라느니 하는 얘기를 하면 아무 데라도 들어가 숨고 싶어요. ‘10년차’라는 경력에 걸맞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저는 아직 한참 모자란 것도 많고….”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라스트신
영화 속 자전거 여행 도중 남매는 든든한 아빠 같은 덕수 아저씨(이문식)를 만난다. 그리고 퉁명스럽지만 속정 깊은 언양댁 아줌마(김여진)도 만나 이전에 미처 경험하지 못한 가족의 사랑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영화는 그런 과정을 담담하고 소박하게 그려낸다. 은철 역시 인물간의 자연스런 호흡 안에 녹아든다. 이전까지의 그가 작품 속에서 도드라지고 빛나는 아역으로 존재했다면 이번에는 듬직한 오빠로서 가만히 동생을 지켜본다. 마지막 엔딩을 위해 감정을 켜켜이 쌓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감정이 북받치는 엔딩장면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나 연기할 때나 가장 기다려온 것이었다. 그 마지막을 위해 차분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인물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그 연기는 무척 인상적이다. 노련한 성인 연기자의 그것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한번도 내 영화를 보면서 만족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가 조심스레 ‘내 연기도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라스트신이다. 이전까지의 그가 매 장면에 최선을 다하는 식으로 연기를 해왔다면 이제 영화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녹아들었다는 얘기다. 그것은 배우로서 누가 말해준다고 하여 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고래를 찾는 자전거>를 통해 박지빈이 성장했다면 아마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박지빈은 영화를 위해 거의 두달 동안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자연스레 스탭들과 친해지게 됐고 이제는 촬영현장에 아저씨나 선생님보다 형이나 누나로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지게 됐음을 느꼈다. 그리고 함께 지낸 엄마 외에 종종 놀러오셨던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큰 힘이 됐다. 그렇게 스탭들과 한곳에서 가족처럼 지내다보니 마지막 촬영의 아쉬움이 그 어떤 영화보다 컸다. 게다가 이제는 마지막 촬영이라며 엉엉 우는 동생 슬기를 다독거려야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런 변화 역시 <고래를 찾는 자전거>가 박지빈을 성장하게 만든 요소들이다. 더불어 “자극적인 영화들이 많은 극장가에 맑고 깨끗한 전체 관람가 가족영화를 한 것도 뿌듯하다”고 말한다.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시면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란 말도 듬직하게 덧붙인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배우다’라는 실감은 부족하단다. “선배님들이 가끔씩 얘기하는 연기의 ‘참맛’ 그런 건 제가 아직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죠. 더 노력하고 경험해야 그런 걸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배우’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계속 배우를 할 거라면 그런 참맛을 알 때까지 연기하는 게 목표예요.” 그렇게 말하는 박지빈을 보고 있으니 <안녕, 형아>나 <아이스케키>로 만났던 아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의젓하다. 그리고 본인이 말하길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찾아올” 영화가 곧 크랭크인한다. 그렇게 박지빈은 이제 막 배우로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지켜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