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다의성과 불확정성을 즐기는 홍상수 영화의 특징을 계승한다는 중평을 받는 <북촌 방향>(<북촌방향>이 아니라 <북촌 방향>으로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글의 결론 부분에서 상술하겠다)은 패턴에 대한 강박과 패턴화로부터 탈주하려는 해체의 에네르기가 한몸을 이룬 기묘한 텍스트이다. 나는 홍상수가 디자인한 플롯이 전통적 서사화법의 작동원리에 대한 대안적 체계를 창조해왔음을 줄곧 주장(<씨네21> 755호 전영객잔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 참조)해왔다. 단일한 체계로의 수렴을 끝내 거절하는 홍상수의 내레이션 방식은 세밀하게 디자인된 플롯과 그 속에서 노니는 인물들에 대한 하나의 생각과 그에 대한 재고(再考)를 추인하는 혁신적인 구동원리를 창안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북촌 방향>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으므로 나는 교묘하게 설계된 영화의 구조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북촌 인근을 지시하는 이정표에 그려진 화살표만큼이나 다양한 갈래의 읽기가 가능한 <북촌 방향>에 대한 여러 독법 중 하나의 버전쯤이라고 간주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시간과 기억의 재구성
<북촌 방향>은 대구에 적을 둔 영화감독이자 교수인 유성준(유준상)의 북촌 유람기이다. 성준이 북촌에 머무는 시간이나 이동의 궤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북촌에서의 성준의 갈지자 행보가 보는 이들을 혼동에 빠트리는 것은 정처없는 이 사내의 발길을 좇아 일목요연한 시간의 순서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시간’이다. 작은 차이에 의해 특정한 지점에서 반복되는 복수(複數)의 재진술이 세부묘사에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영화가 시간의 미궁에 대한 탐구라고 추측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북촌 방향>을 끌고 가는 내레이션의 원리는 시간이 전부가 아니다. 시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기억’ 또는 ‘기억의 착시’라는 차원에서 ‘상상’의 징후들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나는 <북촌 방향>의 현혹적인 내러티브 디자인과 관련하여 두 가지 가설을 가지고 그것을 풀이하려 한다. 첫째, <북촌 방향>의 플롯은 스토리 사건의 순서, 즉 실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술되지 않는다. 플롯은 시간의 순서를 다소 조작하고 있으며 스토리 시간상 먼저 일어난 사건이 뒤에 붙어 있는 경우가 있고, 그 역의 경우도 성립한다. 둘째, 플롯 안에는 시간이라는 변수뿐 아니라 기억과 상상이 섞여 있는데, 기억과 상상은 시간의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일 뿐 아니라 홍상수가 이 영화를 통해 묘사하려는 우주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위해서도 퍽 긴요하다.
플롯에 제시된 사건의 배열을 종합했을 때 스토리상으로 성준이 북촌을 소요하는 시간은 우선 3일로 추정된다. 3일째 아침에 이야기는 닫힌다. 그런데 스토리 시간이 닫히는 이 지점은 현재 영화의 결말과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먼저 3일로 추정된 스토리 시간에 대한 가설. 스토리 시간은 3인(성준-영호-보람)이 세트가 되어 움직이는 하루, 그리고 4인(성준-영호-중원-보람)이 세트가 되어 움직이는 하루로 단순화할 수 있다. 플롯상으로 제시된 사건을 요약하면 성준이 서울에 도착하여 북촌 인근을 전전하다(영화학도 세명을 만나 인사동에서 경진의 집이 있는 고덕동으로 향하는 에피소드는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므로 따로 기술하겠다) 영호와 보람을 만나 이 3인이 술집 ‘소설’에서 예전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하루(첫날), 성준-영호-중원이 음식점 ‘다정’에서 회합을 갖고 그날 저녁 이들 무리에 보람까지 합류하여 4인이 ‘소설’에서 시간을 보내는 또 다른 하루(둘쨋날), 또 다른 어느 날 낮에 ‘다정’에서 3인(성준-영호-보람)이 술자리를 한 뒤 그날 밤 다시 ‘소설’에 가는, 그리고 성준이 영호와 보람을 보내고 술집 여주인 예전의 침실에 드는 하루(셋쨋날) 순서로 배열된다. 마지막으로 예전의 집을 나선 성준이 영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 셋을 차례로 만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여인을 만난다(넷쨋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북촌 방향>에서 명확한 시간적 표지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묘사되고 있는 고갈빗집-고덕동 라인이 시간의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고갈빗집에서 고덕동에 이르는 이 초반부 에피소드는 3인 세트의 여정, 4인 세트의 여정 중 어느 쪽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덕동으로 향한 성준의 여정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준이 고갈빗집에서 학생들과 합석하게 되는 장면의 연출을 보자. 고갈빗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뭔가를 적고 있는 성준에게 합석을 청하는 것은 학생들인데 그들의 최초 제안은 명시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화면 밖 목소리(voice off)로만 전해진다. 그들이 말하는 장면도, 성준이 그들의 테이블에 합석하는 장면도 없다. 흡사 유령의 목소리 같은 음성에 이끌려 성준은 생면부지의 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옛 애인의 침실에까지 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사동 고갈빗집에서 영화학도 세명과 얽혀 고덕동 경진의 집에 가는 사건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성준은 경진의 집을 찾아가는 상상을 했을 뿐이며 학생들과 낮술을 마시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몇 가지 디테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성준의 심리적 동기를 추론해보자면 세 학생은 경진에게 이끌리기 위한 상상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이후 경진의 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어쩌면 과거 성준과 경진의 반복적 관계의 일부에 대한 회상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 명징한 증거는 고덕동이라는 공간의 장소성이다. <북촌 방향>뿐 아니라 홍상수의 영화에서 한 공간은 특정한 장소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경진의 집이 있는 고덕동은 유일하게 북촌을 벗어난 장소라는 점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이 시퀀스를 제외하면 성준이 배회하는 장소는 북촌에 한정되는데 여기서 북촌은 물리적 장소성을 상실한 환유적 공간, 즉 성준이 머무는 소우주이다. 그러므로 북촌의 바깥은 실재하지 않는 장소, 곧 성준의 기억과 회상, 강박이 창조한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고덕동으로 향하게 되는 빌미와 그곳에서의 사건이 모두 상상(경진의 집에서의 에피소드의 경우 회상)임을 보여주는 작은 단서들은 고갈빗집-고덕동의 세트가 종료된 뒤 곧바로 등장한다. 비로소 연락이 닿은 영호를 처음 만난 성준은 고갈빗집에서 임연수어를 먹었다고 하고, 이 말을 들은 영호는 “낮술 했구나”라고 한다. 고갈빗집에서부터 고덕동까지의 여정에 괄호를 쳐놓는다면 성준은 혼자 고갈빗집에서 낮술을 하다 옛 애인에 관한 백일몽에 잠시 사로잡혔고 영호의 연락을 받자 그의 작업실 앞으로 온 것이 된다. 또 다른 증거가 고덕동에서 경진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 들어 있다. 성준이 경진의 집 현관을 나서기 직전 경진은 “문자라도 하려는데 번호는 그대로인지”를 묻는다. 성준의 상상 또는 회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 대화는 고갈빗집-고덕동 세트가 끝난 뒤 바로 이어지는 여배우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여배우의 입을 통해 다시 나온다. “전화해도 돼요?”(여배우) “번호 그대로야.”(성준) 이웃하는 두 장면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고갈빗집에서 상상했던 경진과의 대화가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현실화된다. 방금 전 상상했던 것을 성준은 여배우를 만나 실연한 것이다. 고덕동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경진이 문자메시지로만 등장한다는 점, 세명의 학생을 거리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성준이 슬금슬금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반면 학생들은 성준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가 된다. 초두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우리를 치명적인 오인으로 끌고 간다. 고덕동이 가상의 세계이고 그곳과 연결된 일련의 사건들이 회상과 상상의 소여(所與)라고 한다면 비로소 북촌 일대를 소요하는 성준의 화행의 경로를 따라 사건을 재배열할 수 있게 된다.
더욱 논란적인 것은 셋쨋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간단히 접수되지 않는 이 셋쨋날의 에피소드는 3인이 세트를 이루는 두날(첫쨋날과 셋쨋날)의 시간 관계를 미스터리에 빠트린다. 그들은 같은 날인가, 다른 날인가? 나는 앞의 두날과 다른 제3의 날인 것처럼 기술되고 있는 셋쨋날의 사건들이 실상 앞의 두날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셋쨋날 에피소드들은 앞의 두날을 보여줄 때 생략되었던 사건이거나 한번 진술되었던 사건의 재진술로 볼 수 있다.
그들은 키스를 했을까?
셋쨋날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일회용 커피잔을 들고 영호와 거리를 걷다가 성준이 여배우와 세 번째로 만나는 사건, ‘다정’에서 3인(성준-영호-보람)이 보람의 잃어버린 개에 대해 이야기하다 저녁에 ‘소설’에 가게 되는 사건, 성준이 영호와 보람을 보내고 예전의 침실에 드는 사건 등이 일어난다. 이중 여배우를 만나게 되는 사건은 4인이 세트가 되어 움직이는 두 번째 날 연결될 수 있고, 3인이 세트가 되어 ‘다정’과 ‘소설’에 가는 것은 첫 번째 날과 연결된다. 전자는 ‘일회용 커피잔’이라는 시간 단서에 의해 간단히 연결된다. 이외에도 정독도서관에서의 대화, 민방위훈련에 발이 묶인 거리에서의 대화 등 커피잔을 들고 있는 상황은 모두 같은 날이다. 후자는 좀 복잡한데, 우선 3인의 ‘다정’에서의 에피소드는 첫 번째 날에 속해 있으나 첫 번째 날을 기술할 때는 생략되었다가 후반부에 끼워넣어졌다. 첫날 소설에 갔을 때 ‘한정식집에서 밥을 먹고 술을 한잔 하려고 소설에 갔다’라고 하는 성준의 내레이션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한정식집에서 3인의 회합은 첫날 3인 세트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긴다. 3인의 ‘다정’ 회동을 우리는 첫날 보지 못하고 셋쨋날에서야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준과 영호, 보람이 ‘다정’에 두번 간 것이라고 해석하기보다 한날의 사건을 둘로 쪼개 앞과 뒤에 각각 배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있다.
이는 ‘다정’과 연결된 ‘소설’에서의 에피소드를 보면 확정적이다. 특별히 성준과 예전의 골목길 키스 장면이 증거가 된다. 무언가를 사러 나간 예전을 뒤늦게 따라 나선 성준은 그녀에게 “미안하다. 그때는 취해서 그랬다”며 사과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전은 성준이 사과하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투이다. 성준은 왜 사과했고, 예전은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정황상 성준이 사과한 이유는 둘쨋날 눈 내리는 밤 골목길에서 기습적으로 하게 된 키스에 대한 사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예전은 그 사건이 기억에 없는 듯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은 정말로 키스한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셋쨋날처럼 기술된 사건들이 앞의 두날과 포개질 수 있다는 위의 가설을 따르자면 성준이 사과하는 그날은 스토리 식단상 첫 번째 날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때까지 키스를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예전의 반응은 내숭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성준은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왜 사과하는가?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성준은 키스에 대해 사과한 것이 아니라 그날 낮에 자신이 벌였던 상상 또는 회상, 그러니까 대취해 경진의 집을 찾아갔던 일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예전은 경진의 영혼을 입은 몸이므로 성준은 경진에게 해야 할 사과를 불쑥 예전에게 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대상의 전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흔하다. 플롯상으로 셋쨋날에 배치된 ‘소설’에서의 나머지 에피소드들은 이렇게 꼬여 있는 시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거나 미묘한 기억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면 첫번째 날과 셋쨋날에 예전에게 성준을 소개하는 영호의 말의 뉘앙스, 예전의 “며칠 있다 가냐?” “서울에는 언제까지 있냐?”는 두번의 질문에 달리 대꾸하는 성준의 대답(한번은 “삼사일”, 다른 한번은 “이번에는 모른다”), ‘소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행위의 디테일들. ‘하나의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건을 재진술함으로써 창조되는 ‘맞지 않는 짝’은 두려운 느낌으로 그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생략된 사건의 삽입이거나 미궁에 빠진 시간에 대한 추측이거나, 한번 진술된 사건의 ‘수정’이거나, 셋쨋날의 에피소드가 첫날과 둘쨋날의 확장된 버전이라면 전체 구조는 살짝 기우뚱해진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자. 첫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이 포개진다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달리 말할 수 있다. 플롯의 끝은 성준이 예전의 침실을 나와 북촌 거리를 배회하는 아침이다. 그런데 예전의 침실에서 보낸 전날이 3인 세트의 첫 번째 날이라면 영화의 마지막을 채우고 있는 이 아침은 4인이 세트를 이뤄 움직이는 둘쨋날 아침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는 둘쨋날을 낮부터(정독도서관에서 성준과 영호의 대화로 출발한다) 보기 때문에 아침은 이날의 진술 중 ‘생략된 사건’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날씨이다. 예전의 침실을 나온 성준은 거리에서 별안간 내리는 눈을 맞는데, 이날이 경진으로부터 ‘오늘 첫눈이 온다’는 문자메시지가 당도한 바로 그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눈이 오락가락하며 내렸던 것이다. 이쯤되면 시간의 전후관계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 예전의 입장에서 그것은 ‘시간’의 순서 때문에 생긴 착각처럼 보이지만, 성준의 입장에서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기억’(상상)의 착오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종합이라면 이 복잡한 이야기의 끝은 눈 내리는 날 아침의 인상적인 택시잡기(둘쨋날 밤이 지난 뒤의 아침)일 테지만, 그 역시 진정한 ‘끝’이라고 할 순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설명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없는 쌍방향 화살표, 머리가 꼬리가 되고, 꼬리가 머리에 붙어 곁가지를 치며 분기하는 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複數)의 변수들
많이 다르다고들 하지만 <북촌 방향>은 조각난 삽화들의 평행구조와 특정한 지점에서 유사성을 가진 동일한 액션이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반복된다는 점에서 전작과 크게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외견상 단순해 보이는 내러티브 디자인이 명징한 구조에 대한 인식을 흐린다는 점에서 <북촌 방향>은 홍상수의 세 번째 영화 <오! 수정> 함께 살펴볼 만한 영화다. 내게 두 영화 사이의 친연성은 서울의 북촌 인근을 무대로 한 흑백영화라는 것 이상이다.
<오! 수정>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기억의 불확정성에 대한 우화로 그 영화를 읽었다. ‘어쩌면 우연’, ‘어쩌면 의도’라는 소제목이 붙은 두개의 장이 서로 마주보는 <오! 수정>의 서사를 동일한 사건을 달리 기억하는 남녀의 심리를 반복과 차이의 패턴을 보이는 말과 행위를 통해 엮어냈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억의 상대성에 대한 탐구라는 결론과 달리 나는 <오! 수정>에서 두번 진술된 사건들 중 일부가 ‘기억의 편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편차’를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정식집에서 영수(문성근)와 수정(이은주), 재훈(정보석)이 식사를 하는 장면은 두번 보여지는데, 두 진술간의 차이는 기억의 편차가 아니라 시간의 편차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을 기억의 편차라고 단정하게 된 까닭은 재훈의 단락(‘어쩌면 우연’)에서 술을 마시다 오바이트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간 사람은 영수이고, 수정의 단락(‘어쩌면 의도’)에서 화장실로 달려간 사람은 재훈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단락 사이에는 누가 화장실에 갔는가보다 더 중요하지만 강조되지 않은 차이가 있다. 재훈의 단락에서 세 사람의 식사는 시작한 지 얼마 안돼 보이는데, 이유는 프레임 뒤 테이블에 식사를 하는 다른 손님들도 보이고 재훈 일행도 술을 많이 먹지 않아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의 단락으로 넘어가면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 나갔으며, 식당 아주머니는 빈 그릇을 주섬주섬 거두고 있고, 재훈과 영수의 취기도 완연하다. 이 차이는 무얼 말해주는가? 두 단락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진술하고 있으며 재훈의 단락과 수정의 단락 사이에 시간이 꽤 흘렀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한 날 영수와 재훈은 모두 화장실로 달려간 셈이다.
중요한 건 이런 착각이 생긴 메커니즘이다. 많은 사람들은 왜 <오! 수정>을 기억의 상대성에 대한 탐구라고 단정하게 되었을까? <오! 수정>의 두번 진술된 사건에는 기억의 편차만큼이나 시간의 편차를 신호하는 증거들이 깔려 있지만 사람들이 ‘기억’이라고 하는 변수에만 초점을 맞추려 했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변수를 놓쳤다. 오인에 의한 눈멂. 강조할 것은 모든 상황들이 시간의 편차를 신호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것이 기억의 편차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 수정>과 <북촌 방향>에서 홍상수는 놀랍게도 한 영화 안에서 시간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변수를 혼용하고 있다. <오! 수정>에서 많은 이들이 기억의 편차로만 이야기를 오해했다면 <북촌 방향>에서는 시간이라는 변수에 강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러티브에 대한 우리의 관성은 하나의 단일한 논리로 이야기를 해석하려 하며 대부분의 영화는 그러한 관성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편하게 이해되지 않는 생활을 이야깃감으로 삼아 쉽게 정의되는 것들에 맞서려는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법은 이러한 단일한 패턴화에 저항한다. 정교하게 디자인한 패턴이 있지만 그 패턴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보는 자들의 곤경이다.
홍상수는 <북촌 방향>에서도 시간의 순서를 추측하기 힘든 모호한 디테일을 반복하는 한편, 명백하게 차이를 설명해줄 단서들도 곳곳에 뿌려놓는다. 이 단서들을 연결하는 ‘짝짓기’가 난망한 이유는 그들이 순서에 따라 배열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 수정>과의 차이라면 여기서의 기억-회상은 집약적이지 않고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궁에 빠진 시간들 사이에 끼어든 상상의 지대들, 겹쳐진 진술들을 추론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하나의 단락 안에서도 시간과 기억(상상)의 작용이 두서없이 섞인다는 것이다. <오! 수정>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오! 수정>에서는 고갈빗집, 한정식집, 레스토랑 등 특정 장소와 연결된 디테일들은 하나의 변수(시간이든 기억이든)에 의해 균질하게 기술되었지만, <북촌 방향>은 한 장소에서조차 여러 변수들이 경쟁적으로 끼어든다.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 다수의 잠재태들을 공존시킴으로서 평행과 반복 또는 경합하는 디테일들이 기억과 상상의 분산된 조각들이라는 것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플롯상의 순서는 실제 사건의 시간의 순서와는 무관하며 심지어 내레이터(성준)의 내레이션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북촌 방향>에는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상이한 버전과 상상적 기억, 끼워넣어진 회상, 연대기적 시간에서 탈각된 휘어진 액션의 라인들이 엉켜 있다. 낮에서 저녁으로 전진 이동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 섹션에서 함께 진술되는 사건들은 꼭 그날 벌어진 사건들의 묶음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힌트 없이 끼어든 고갈빗집에서의 상상과 회상, 한날을 나누어 앞과 뒤에 놓은 배열, 한번 말해진 사건의 재진술이 혼란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셋쨋날, 3인 세트의 ‘소설’ 에피소드가 혼란을 주는 이유는 그 디테일들이 첫날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에 있었던 4인 세트로 움직이는 둘쨋날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두 세트가 가깝게 맞닿아 있으며, 골목길에서의 ‘키스’ 신 등이 선명한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인식의 지평은 협소해진다. 플롯상의 배열에 종속되어 우리는 3인의 세트와 4인의 세트를 평행적으로 연결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는데 그 순간 모든 게 흐려진다.
북촌적 사유의 힘
<오! 수정>에서 시간의 편차를 기억의 감산과 가산으로 오인한 것처럼 <북촌 방향>에서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미스터리만으로 단정한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단단한 체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변수가 되고 때때로 기억이나 상상, 꿈이 이 모든 견고한 정보의 흐름을 탈각시키며 골을 아프게 할 것이다. 같은 날에 발생한 것처럼 붙어 있는 사건이 다른 날의 것이거나 며칠 뒤의 일처럼 기술되는 두 사건이 한날로 연결되는 이러한 방식은 내레이션의 보편적 원리를 파괴한다.
홍상수에게는 ‘연결’(continuity)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이미지들이 리액션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프레임들로만 구성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프레임은 언제나 닫혀 있고 한 시공간에서조차 그 연결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성준이 고갈빗집에서 세 학생과 얽히게 되는 장면의 연출이나 이어지는 신에서 성준이 경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집을 나서려 할 때의 이미지 구성은 이전과 이후 숏이 완전히 분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스타일에 대한 관습적인 해석을 따라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숏의 전환이 완벽하게 단절적이어서 다른 시간의 지대로 넘어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액션의 라인은 항상 도막이 난다. 그러나 뭉툭하게 절단된 이 끊어진 선들은 거기서 생명을 다하지 않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부활한다. 이 죽은 선들의 재림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점 사이의 방향성을 사고하게 한다.
이쯤에서 ‘북촌방향’이 아닌 ‘북촌 방향’으로 제목을 표기한 이유를 말해야겠다. 우선 홍상수가 직접 쓴 제목이 ‘북촌 방향’이다. 북촌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지도 위에 압핀으로 고정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인사동, 가회동, 삼청동마냥 구획되어진 영역이 아니며 행정구역상에 등재된 동네도 아니다. ‘번지 없는 마을’ 북촌은 그저 서울 사람들의 의식 속에 어렴풋이 그려지는 뭉뚱그려진 공간, 언저리의 장소이다. 지리적 명시성이나 확실성을 허용치 않는 가변적이고 점이적인 성격의 지대. 그러므로 북촌은 실재하는 장소이기에 앞서 지시적이고 지점적인 사유를 한사코 거절하려는 홍상수의 인식론이 웅크린 세계를 명명한 레토릭이다. ‘방향’이라 함도 역시 하나의 지점에 고정되지 않고 줄기차게 지향성을 유지한 채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잘리고 사라졌다 다시 재활의 순간을 맞는, 확장하는 방향적 운동의 선들. 홍상수가 제 손으로 ‘북촌방향’이 아니라 ‘북촌 방향’이라고 쓴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북촌 방향>의 기만적으로 보이는 내러티브 디자인은 이 언저리의 장소를 소요하며 도출된 북촌적 사유의 결과이다. 반복과 변주의 패턴에 따라 날짜가 흘러갈수록,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대안적 잠재태들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본질적으로 <북촌 방향>의 서사는 무작위적인 만남과 대화들을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뜨개질한 것 같은 한 남자의 상념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시간의 연대기도 있고 기억이나 회상, 상상의 간섭도 있다. 그러므로 <북촌 방향>이 주는 감흥에 젖어보고자 북촌을 걸어볼 필요는 없다. 북촌에 가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해묵은 인식의 더께를 걷어내고 이 무정형의 우주를 노닐게 하는 ‘북촌적 사유’의 힘을 느끼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서의 모든 상황들은 우리의 비좁고 관성적인 인식을 벗어나 행여 바보 같은 추정은 없었는가를 되돌아보게끔 하는 분별과 회의(懷疑)의 시험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