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그 영화가 놓인 자리
2011-10-07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차이와 반복

고작 서너편 보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북촌방향>은 홍상수 영화의 본질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이 특히 프랑스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한국적인 것은 (다분히 감독의 자전적 고백으로 보이는) 등장인물의 비루함(‘찌질함’)뿐, 그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들은 80년대 이후 세계를 풍미했던 프랑스 담론의 개념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은 대부분 이 지면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으니 설명을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지루함

웬만한 관객은 홍상수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낄 거다. 그 권태(ennui)는 실은 삶 자체의 지루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느 나치(괴벨스?)의 말이다. “대중은 이미 비루한 일상에 충분히 지쳐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멋진 환상이다.” 나치 대중이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그러나 대중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자기들이 원하던 환상을 결코 보지 못한다. 외려 극장 밖에서 보았던 그 비루한 현실을 다시 보게 될 뿐이다.

현실에서 지겹게 보았던 일상을 영화로 다시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브레히트라면 이런 경우에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일상 속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주목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에게 그런 인식론적 의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인식론은 거대 서사(grand recit),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든 대중의 의식을 일깨워 혁명의 주체로 묶어세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해방서사 위에 서 있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 그런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 영화와 정치가 공유하는 영웅의 서사다. 서사시를 믿지 않기에 홍상수의 영화에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뚜렷한 기승전결도, 위기나 반전과 같은 극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의 ‘리얼리즘’을 말한다면, 그것은 혁명적-비판적 인식을 촉구하는 고전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차라리 신즉물주의의 객관성에 가깝다. 떠들썩한 이념의 영웅시대 이후에 찾아온 포스트모던의 냉담한 세계기분을 반영한 데드팬(deadpan)이랄까?

우연에는 용기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철학은 필연적인 것(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역사는 현실적인 것(이미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극시는 개연적인 것(일어날 법한 일)을 모방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에 ‘이어서’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하나의 사건의 ‘결과로’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다르다. 극시의 플롯은 물론 사건과 사건을 인과관계에 따라 연결해야 하고, 갈등의 해결을 결코 우연에 맡겨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극시의 개연성을 ‘극적 필연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런 의미의 ‘극적 필연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플롯에 즐겨 우연(contingency)을 도입한다.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근대의 모든 거대서사들은 저마다 자신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그랬던가? 플롯에 우연을 도입하여 극적 필연성을 깨뜨림으로써 홍상수가 말하려는 것은 이게 아니었을까? ‘우리가 필연이라 부르는 것이 실은 우연의 산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관습에 불과하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북촌방향>에서는 이 인식이 대사 속에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홍상수에게 우연성은 플롯의 원리이자 동시에 창작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종종 그날 촬영할 각본을 현장에 도착해 쓴다고 들었다. 또 우연히 들은 지인의 얘기(“오는 길에 영화에 관련된 네 사람을 만났다”)를 그대로 영화에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로써 영화는 감독이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작품’이 아니라, 감독 자신도 예상하지 못하는 우연성의 ‘사건’이 된다. 이는 물론 작품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작가의 죽음’이라는 명제, 즉 ‘미적 주체성의 해체’라는 포스트모던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플라톤이 ‘필연’을 위해 우연을 배제한다면 디오게네스는 ‘필연’을 허구로 보고 우연을 긍정한다. “우연에는 용기를!” 이른바 ‘극적 필연성’이란 것도 결국 작가가 구성한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홍상수처럼 우연을 긍정하고 그것과 놀이를 벌이는 게 현실의 더 충실한 반영이 될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 작가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일상을 기록하는 자동기록장치가 되는 것(가령 “일기 쓰듯이 영화를 만든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과 노는 데에는 고도의 기지와,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니까.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전통적 플롯은 기승전결의 명확한 선형성을 갖는다. 타락으로 시작된 인간사가 신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듯이, 극의 결말에서 불의는 무너지고 정의는 회복된다. 하지만 우연을 도입한 플롯에서는 사건들이 인과의 선형적 사슬에서 풀려나 거의 공간적으로 나열된다. 그 때문인지 사건이 전개되어도 갈등이나 문제가 해결된다는 느낌이 없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도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거기서 그렇게 영원히 찌질댈 것이다.

차이와 반복

시간의 비선형성은 플롯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메타적 수준에도 존재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설정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얘기를 같은 방식으로 하고 또 한다. 한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은 다른 영화를 통해 되돌아온다. 한 배우가 한 감독의 여러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홍상수의 경우에는 이게 그저 캐스팅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그의 첫 영화의 주연은 현실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지고서 다른 영화로 회귀한다. 선형적 시간이 그곳에서 동일자는 영원히 회귀한다.

<북촌방향>을 만들기 전에 감독은 “한 장소에 세번 다시 가는 얘기”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는 물론 반복 가능성(iterabilite)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동일한 낱말이라도 반복될 때마다 그때그때의 맥락에서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 가령 영화에서는 여성의 심리에 관한 얘기(‘여자들은 자신의 성격이 대립되는 두 극단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가 두번 반복된다. 첫 번째 상황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여겨지지만, 두 번째 상황에서는 그것이 꽤 진지한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장소에 세번 간다고 (기승전결이라는 의미에서) 플롯의 진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뒤샹이 말한 ‘초박막’(inframince, 앵프라맹스), 즉 종이 한장 두께의 미세한 차(差)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차이는- 가령 뒤샹의 변기와 그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변기들의 차이처럼- 지각적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나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구별이 뚜렷해야 한다. 반복을 통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차이와 반복’의 놀이는 ‘동일자의 무한증식’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증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모든 위대한 발명이 이루어지자, 이어지는 마니에리스모는 유의미한 창안 없는 ‘기교’의 과시로 흘렀다. (‘매너리즘’) 앵프라맹스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뒤샹에 따르면, “그 차이는 지각하기 힘들수록 효과적”이다. 하지만 지각하기 힘든 차이는 동시에 단순한 반복에 접근하기 마련. 그리하여 반복을 통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경우, 곧바로 반복의 권태를 우연을 다스리는 재미로 상쇄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개념적으로 홍상수는 가장 위험한 지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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