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정우가 만드는 강 변호사에 내가 이입되어갔다”
2011-10-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최성열
<의뢰인> 연출한 손영성 감독 인터뷰

손영성 감독은 데뷔작이자 전작인 <약탈자들>로 주목을 모은 바 있다. 장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 영화였다. 그러니 그 영화의 감독이 본격적인 법정스릴러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어떻게 영화를 연출하게 된 것인지 그 과정이 궁금했다. 프로젝트의 첫 시작과 캐스팅 과정과 연출의 이모저모를 그에게 들었다. 그걸 듣고 나니 그가 적임자였음을 알겠다.

-제안받은 프로젝트라고 들었다.
=<약탈자들>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 신창길 프로듀서가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며 친구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시나리오 하나를 전달하고 싶다고. 그때 만나서 받은 시나리오가 <의뢰인>이었다. 130페이지에 이르는 엄청난 시나리오였다. 읽는 데만 8시간이 걸렸으니까. 법정스릴러라는 새로운 점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구조적으로 <약탈자들>하고 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하게 된 것 같다. 2009년 5월경부터 각색에 들어갔다. 하정우가 가장 먼저 캐스팅됐다. 그때 당시 그는 <황해>를 들어가느냐 우리 영화를 들어가느냐 하고 있었는데, <황해>가 먼저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한 1년 기다리면서 가사생활을 좀 했다, 시나리오를 고쳐 나가면서. (웃음) 1년이 지날 즈음 다른 역할도 캐스팅됐다. 작은 역할이지만 장혁이 열정적으로 맡아주었다. 처음에는 검사와 변호사 투톱으로만 가고 용의자 역할은 조금 숨겨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약간 달라진 거다. 검사 역은 그전부터 박희순에게 제안했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지난해 추석 즈음에 고친 시나리오를 보고 마침내 수락해주었다.

-셋 중에서도 하정우의 역할이 가장 크다. 그의 어떤 점이 역할에 맞겠다는 인상을 받았나.
=하정우를 처음 만났는데 이야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똑똑하고 총명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는 기존에 봤던 영화 중에서 모델을 뽑아내 인물을 만들어내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낼 것인가 기대감이 높았다. <대부>의 말론 브랜도, 할리우드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미국 드라마 <앙투라지>의 한 인물, 그리고 실제로 알고 지내는 자기 친구 중 한명에서 그런 걸 뽑아냈다. 그리고 완벽한 시나리오보다 의외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우리 둘 다 동의했다.

-그가 맡은 강 변호사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 캐릭터를 세워나간 과정도 궁금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좀 있는데, 사실 시나리오의 강 변호사와 완성된 영화의 강 변호사는 많이 다르다. 점점 하정우가 만드는 강 변호사에 내가 이입되어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막내동생 같은 역할이었다. 사무장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귀여운 그런 캐릭터였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약간 형 같다. 그는 버럭 화를 내서는 안된다. 그러면 무섭고 진지해진다. 촬영하면서, 하정우의 숨결과 말소리와 냄새를 맡아가면서 그렇게 다른 방향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다. 그러면서 촬영현장이 훨씬 재미있어졌다. 처음에 내가 설정한 캐릭터는 스스로 바보가 되고 어릿광대가 되고 사람들을 웃기는 익살꾼, 그럼으로써 사건으로부터 자신만큼은 면책권을 받는 인물이었다면, 하정우가 연기한 이 인물은 자신조차 면책 대상이 아닌, 모든 걸 몸으로 다 받아들이는 그런 캐릭터였다. 한마디로 훨씬 좋아졌다.

-안 검사(박희순)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그렇다. 영화의 중·후반 흐름이 다른 건, 안 검사의 역할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초반에 한철민(장혁)이 과거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숨기고 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안 검사다. 초반에는 안 검사가 어떤 패를 갖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플롯을 통해 그게 밝혀지면서 변호사 중심의 초반부가 후반부로 갈수록 세명의 싸움이 된다.

-시나리오의 내용을 어떻게 축약하느냐가 주요 관건이었을 거다.
=130페이지 시나리오였으니까 거의 드라마 한 시즌 수준이었다. 최종본은 80페이지로 줄였다. 하지만 130페이지 분량에 있던 내용들이 영화에 거의 들어갔다. 내용을 조금 압축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시나리오에는 증거와 증인들이 조금 더 있었고 촬영에도 그것들을 반영했지만 덜어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들어낸 건 잔가지 정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최종편집 과정에서 15분 정도를 들어내면서 몇 가지 디테일들이 솎였는데, 정돈이 더 잘된 것 같다.

-본격적인 법정스릴러이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쓴 점은 무엇이었나.
=법정드라마나 법정스릴러 장르는 확실히 표현 면에서 다소 제약을 받는다. 법정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축소판이며 일종의 연극무대가 펼쳐지게 된다. 그로써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무대장치가 제공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판결이라는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제약을 낳는다. 그 결론을 향해서 달려가는 방법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 법조계의 판결 방식이 배심제를 더 지지하는 쪽으로 가거나 하면 상상할 거리가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상상의 수를 늘리기보다 영화의 밀도를 중시하고, 그 밀도를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한편 촬영시에는 그 장면에 공감할 수 있는가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집중하면 되는 정도였다. 법정스릴러여서 특별히 다른 촬영방식이 요구되진 않았던 것 같다.

-첫 시도이기 때문에 참조물들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시드니 루멧의 <평결>(<심판>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졌다)에서 폴 뉴먼의 캐릭터가 훌륭했던 것 같다. 그런데 법정드라마는 사회파 드라마와 추리극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 듯하다. <의뢰인>은 추리극에 비중을 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으로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1957년 영화 <검찰측 증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토 플레밍거의 <살인의 해부>도 참고했다. 시체 없는 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판례를 보면, 몇년 전 대전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이 있다. 거기에서 물론 좀더 정교한 정황 증거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더 참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영화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는 추리극인 동시에 인물들의 부딪침과 캐릭터의 맛에 더 집중하는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여러 다양한 조연들의 등장은 이 영화의 이야기 모양을 부챗살처럼 펼쳐낸다.
=인물들의 등퇴장은 시나리오작가가 처음 썼던 시나리오에도 대개 있었다. 그 안에서 조연들은 뭐랄까, 지금 주인공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그리고 미지의 문을 마주칠 때마다 열쇠로 그 문을 하나씩 열어주는 그런 역할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건과 인물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에 비하여 이야기의 찰기가 다소 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담아내는 밀도의 경중이랄까, 활동성이랄까, 그 점이 덜 느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법정스릴러에서 반전을 주고받는 경우는 많다. 그러다 보면 공판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가 또 다른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되면서 주도권이 옮겨다니게 된다. 그 흐름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따라 관객의 시선도 이쪽저쪽으로 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투르기에 대한 고민도 했으나, 그걸 계산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승과 패의 요인을 만들기보다 끝날 때까지 오히려 양쪽 다 호각지세로 붙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게 오히려 현대적인 관객이 과정에 더 몰두하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했다.

-전작 <약탈자들>도 그렇고 <의뢰인>도 그렇고, 의문 구조를 다루는 영화다. 두편을 통하여 이런 구조의 연출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한 셈이다. 이 구조에 대한 매혹은 한시적인가 지속적인가.
=일단은 그런 구조가 내게 재미를 주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멜로도 중요한데, 그건 자신없다. (웃음) 내가 약간 건조한 사람이라 멜로보다는 다른 형식의 미스터리로서, 경이롭고 신비로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음에 또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말하자면 <라쇼몽> 구조 같은 영화의 달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고. 전작에서는 대중과 만나는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는데, <의뢰인>을 만들면서 그런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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