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나이’는 오해받아왔다. 집에 오면 “아는?”, “밥도”, “자자”, 딱 세 마디만 한다는 부산 남자들은 무뚝뚝하고 고집 세며 센스마저 없는 마초적 남성의 대명사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속 깊고 인내심 강하며 겉과 속을 다르게 꾸밀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허세는 그동안 ‘부산’을 표방하는 여러 편의 영화에서 소모되어왔지만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의 온기는 없었다. <투혼>은 그런 편견을 걷어버리고 간만에 현실적인 지방색을 제대로 담아낸 영화다. 단지 디테일과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한물간 야구 스타의 성장담을 뼈대로 한 이 영화는 스포츠영화와 가족영화, 신파와 멜로드라마의 교집합 속에서 부산 남자, 아니 부산 사람들의 솔직단순한 매력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통산 149승, 최고 구속 161km, 3년 연속 MVP라는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투수였던 윤도훈(김주혁)은 한때 마운드를 주름잡던 스타였지만 지금은 떨어진 실력과 버리지 못한 자존심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야구장의 문제아다. 패전처리 역을 거부하며 2군으로 강등당한 그는 1년 전 바람을 피우다 걸려 집에서도 쫓겨나 후배 집에 얹혀사는 신세다. 그의 아내 유란(김선아)은 철부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도훈이 정신 차리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다. 그러던 와중에 유란이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도훈은 아내의 바람대로 다시 한번 마운드 위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다.
몰릴 대로 몰린 철없는 퇴물 야구 선수와 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아내. 가족, 사랑, 도전, 성장의 드라마. 흔히 상투적이라 하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뻔하다는 건 다른 말로 안정적이고 검증된 이야기란 의미이기도 하다. 9회말 2아웃의 역전드라마를 이미 한번 봤다고 해서 다음 경기에서 그것이 감동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요는 진부한 소재와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내는가의 문제다. <투혼>의 소재와 상황들은 분명 뻔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사이를 채워나가는 디테일한 상황과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반응이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투혼>은 야구를 소재로 하지만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식의 스포츠영화와는 그 궤적을 달리한다. 흔한 신파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도 조금 다르다. 절정을 장식하는 결승 경기를 위해 세차게 달려가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의 감동을 위해 비밀을 숨겨놓지도 않는다. 초반부터 극적인 상황을 던져주고 그 다음 인물들의 반응을 찬찬히 보여줄 뿐이다.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내지 않는 전개는 자칫 밋밋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잘한 코미디의 풍성함이 이를 메워준다.
전체적으로 절제되어 있는 이 영화는 소동극 코미디의 일인자 김상진 감독의 10번째 작품이자 첫 번째 가족영화다. 깔끔하고 담백한 이번 영화에서는 웃음에 대한 여유와 감독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코미디를 능수능란하게 다뤄본 김상진 감독이기에 가능했을 수수한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유명한 대사처럼 검증된 드라마는 그것만으로 이미 희비극을 매끄럽게 넘나든다. 현란한 수사도 없고 돌려 말할 줄도 모르는 영화지만 <투혼>은 소재 자체의 진정성을 믿고 이를 뚝심있게 풀어놓는다. 덕분에 인물들의 솔직한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현실적인 드라마는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진심을 전하는 데 복잡한 설명이나 기교는 필요없다. 설득은 “오빠야~”면 충분하고 용서는 “잘못했습니더” 한마디면 족하다. 그야말로 ‘부산’스러운 화법이다. 마지막 신파장면이 조금 과하고 지루한 감이 있지만 어쩌면 그 늘어짐이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참다 참다 방언 터지듯 쏟아내는 이해와 다독임의 따뜻한 순간들은 부산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과 닮았다. 보편적인 지점을 절묘하게 잡아낸 주연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는 물론, 조연과 아역들의 연기도 이를 훌륭히 뒷받침한다. 과묵하고 근엄한 감독님이 돌변하는 장면처럼 늘어지는 긴장을 곳곳에서 메워주는 깨알 같은 재미도 쏠쏠하다. 가을 야구가 코앞인 지금,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롯데 홈구장의 현장감 넘치는 열기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