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방향>을 처음 본 날부터, 얼마간 이 영화의 어떤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영화를 두 번째 볼 기회가 오기 얼마 전, 신기하게도 며칠 간격으로 두번의 꿈을 꾸었다. 유독 생각을 하면 할수록, 구조를 그리면 그릴수록 멀어지는 이 영화를 조금이라도 붙잡아보기 위해, 지금 나는 내 꿈에 기대어 이 글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채로 시작하려고 한다. <북촌방향>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의 글들은 이미 많았고 나는 결국 북촌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으니, 이 글은 그저 감상을 분석으로 전달하기에 끝내 실패한 자의 이상한 질문들, 혹은 넋두리 정도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헛소리 같은 꿈 이야기지만 그 꿈에서 느꼈던 감정, 그때 본 이미지들을 감싼 무의식이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날것 그대로의 느낌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꿈의 기억. 나는 아마도 지금의 <북촌방향>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예상치 못한 2부가 시작되었는데, 2부의 제목은 무려 ‘지옥편’이다. 흑백의 뭔가 반복 순환하는 구조였던 것 같고, 얼음처럼 아주 서늘하고 투명한 어느 여인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러나 움직임 없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번째 꿈이 찾아왔다. 홍상수 감독이 나를 초대해서 신작의 한 장면을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재연하게 했다. 무대 위에 입체적인 구조로 배열된 의자에 여배우들이, 맨 앞자리에는 홍상수 감독이 앉아서 고요하게 모두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홍상수 감독에게 “이번에는 살아 있는 시선의 영화네요”라고 짐짓 확신의 어조로 말하며 바로 이 순간을 언젠가 꿈에서 봤다고 혼자 되뇌면서 이상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경진이 불가능성이라면 예전은 가능성
실은 지금도 이 우스운 꿈들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이 꿈들이 어쩌면 영화의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북촌방향>을 다시 보니, 그저 영화에 대한 비평의 무력감이 나타난 꿈이었을 따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이상한 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북촌방향’에 이어지는 ‘지옥편’이라니. 나는 결국 ‘북촌방향’을 죽음으로 느꼈다는 건가. 언제부터인가 홍상수의 영화를 죽음 안에서 읽는 건 영화 속 수많은 우연의 생기와 활력을 쉽게 단순화하고 가리는, 좀 쉬운 유혹이라고 여겨왔던 터라, 설사 죽음의 기운을 느낄 때조차도 그것은 그 죽음의 기운과 싸우고 떨쳐버리는 과정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 여지없이 무의식에서 그 죽음 충동이 드러난 걸까. 물론 <북촌방향>을 죽음 안에서 읽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슬픔과 섬뜩함을 안기는 성준(유준상)의 마지막 클로즈업은 마치 그제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표정 같고, 그간의 여정을 유령이 된 남자의 삶에 대한 몽상, 혹은 꿈속에서 유령이 되어 부유하는 남자의 시간으로 읽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북촌방향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인가. 하지만 이처럼 사후적으로 이야기를 규정하거나 특정 장면들을 상징적으로 파악하는 건 아무래도 홍상수의 방식은 아니며, 북촌의 모호한 시간을 너무 명징한 그릇에 담는 것이다.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의 시간적 층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죽음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죽음을 미지의 영역으로 탐구하고 치켜세우지만 홍상수에게 죽음이라는 추상은 삶의 불가해함에 비해 차라리 명징한 것은 아닐까, 점점 더 믿게 되는 나로서는 ‘지옥편’이라는 이 유치한 꿈속의 제목을 죽음과 겹쳐둘 수 없다. 그의 세계는 죽음이 드리워질 때조차, 죽음에 아주 가까이 있을 때조차, 죽음이 아니라 삶의 생기로 숨쉬기 때문에 점점 더 현학적인 언어로, 관념적인 수사로 해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그 ‘지옥편’의 꿈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없이 맑은, 그 지옥을 꽉 채운 여인의 얼굴인 것 같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북촌방향>을 보는 동안, 북촌의 세계는 성준이라는 남자의 시간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왜 두번의 꿈에서는 온통 여자들뿐이었을까. 왜 그 지옥에, 그 무대 위에 남자는 없었을까. 문득 지옥에서 투명하게 빛나던 여인의 얼굴, 어두운 무대에서 쏟아지던 여인들의 투명한 시선이 마치 지옥을 구원하는 여인들의 기품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정된 장소, 사라져버린 남자, 한 자리에서 어딘가, 밖을 응시하는 여자의 시선들, 불길함과 충만함, 차가움과 따뜻함, 어둠과 빛. 이 꿈들이 영화의 의미일 리는 없지만 나는 이 꿈들이 반복해서 내게 안긴 막연한 이미지의 감흥과 <북촌방향>의 시간이 처음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의 덩어리가 맞닿는 지점들을 생각해보며 조금은 무모하게 영화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려고 하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놀랍고도 기이한 시간의 구조에 대해서 말해왔다. 하나의 줄기로 추릴 수 없는 구조, 아니, 구조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 형태이므로, 다양한 추론이 가능하며, 오직 미끄러지는 추론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북촌방향>의 전체 시간을 인물의 대사나 이야기의 정황으로 따져 묻고 그 비밀을 밝혀내고 재구성하는 그 추론이 개인적으로는 점점 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시간의 각 단락(술집 ‘소설’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상황을 편의상 ‘단락’으로 칭할 것이다)이 서로 얼마나 겹치는지, 어떤 매개로, 순서로 연결되는지, 어느 쪽을 진짜로 믿을 것인지, 그러니까 이 영화가 자아내는 짓궂은 시간의 혼란이 영화적으로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그게 정작 이 영화의 신비로움의 핵은 아니라는 생각에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북촌의 신비로운 정념은 반복되는 시간 단락들 안에서, 그리고 단락의 배열 안에서 만나고 분리되고 어긋나고 젖어들고 퍼져가는 남자의 시간과 여자의 시간 각각의 활동, 그리고 서로에 대한 작용에서 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북촌의 비밀은 실은 정황의 반복이 만들어낸 시간적 엉킴이 아니라, 그 시간적 엉킴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북촌의 남자와 여자의 시간의 호흡에 있다.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영화 속 엉킨 시간이라는 추상은 구체적인 특정 순간들의 합이 아니라, 그 안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한 구체들의 작용이다.
이 영화의 반복이 워낙 강렬해서 처음에는 단락의 공통된 순간들에 이끌리는데,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각 단락들에 보이는 미세한 변화들이 중요하고, 그것이 영화 속 우연의 작용일 것이며, 그 변화들이 단락의 전체 배열 안에서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나를 붙든 막연하지만 믿게 되는 느낌이 있다. 여자는 그 자리에 있고, 남자는 움직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를 방문하는 남자의 여행은 익숙한 이야기니 여기까지는 그리 특별한 느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남자와 여자의 동선이 시간의 파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다. 그 이상한 느낌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먼저 영화 속 남자와 여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준이 고덕동에서 만나는 경진(김보경)과 북촌에서 만난 예전(김보경)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예전’이 ‘예전의 경진’인지 아닌지의 문제보다 내게 흥미로운 건, 예전이 경진의 펼쳐짐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경진이 추상이면 예전은 구상, 경진이 불가능성이라면 예전은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 느낌은 경진과 예전 홀로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고 성준이라는 남자가 이 여인들을 지나가면서 생긴다.
폐쇄된 시간의 원과 우연의 활동들
고덕동에서 경진과 헤어지고 나서 성준이 술집 소설에서 경진과 똑같이 생긴 예전을 만나는 세번의 시간을 잘 들여다보자. 소설1에서 예전과 첫 대면을 한 성준은 경진이 떠올라 깜짝 놀라 당황하지만 별일 없이 일행과 어울리다 술집을 나선다. 소설2에서 성준은 예전과 대면한 술집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예전이 우연하게 밖으로 나오길 빌며, 그때 경진의 애처로운 문자가 오고, 이후 그의 바람대로 밖으로 나온 예전과 만두를 사러 갔다 오는 길에 달콤한 키스를 한다. 소설3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예전은 술집에 등장하고 성준이 밖으로 나왔을 때, 예전이 먹을 것을 사러 간다며 골목을 빠져나가자 경진에게서 저주의 문자가 오고 성준은 예전을 따라간다. 돌아오는 길에 성준은 예전과 키스하고 일행을 보낸 뒤에 예전의 술집으로 돌아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그녀와 이별한다. 나는 이 세번의 ‘소설’을 지나면서, 예전이 경진과 부딪히며, 성준이 꿈꾸는 우연 안에서 확장된다는, 혹은 퍼져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캐릭터의 층위가 두터워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가 다른 하나의 분신이라는 의미도 아니라 이 여인의 표면이 펼쳐지는 것 같은 인상. 그 인상은 어쩐지 이 여인의 시간을 반복 순환이 아닌, 어딘가로 열려진 느낌으로 이끈다. 그건 순전히 내 느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느낌을 조금은 뒷받침해줄 대사들과 모습들이 있다. 예전은 소설3에서 성준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달력에 무언가를 적고, 성준과 헤어질 때 “그래도 몇년은 추억할 게 생긴 거네요”라고 말하며 일기를 쓰기로 다짐하고, 소설1, 2, 3에 성준과 함께했던 보람(송선미)은 소설3에서 성준과 헤어질 때, “당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고 볼 거예요”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 여인들은 미래에서 현재를, 현재에서 미래를 본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성을 거부하는 영화에서 이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으니 달리 말하는 게 좋겠다. 이 여인들의 시간을 원으로 본다면 그 원은 막혀 있는 원이 아니라 테두리 어딘가가 뚫린 원이다. 그 원은 미완성인 채로 그렇게 남겨질 수도 있고, 다른 원과 이어져 다른 모양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여인들을 지나가는 성준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다. 그는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경진, 예전과 헤어질 때마다 “연락하지 마. 힘들어. 우리는 다시 만나면 안돼. 내가 알아”라고 부득부득 강조한다. 그는 끝을 안다(고 믿는다). 이 남자의 시간은 테두리가 꽉 막혀 있는 원이다. 그 원 안에서 무수한 우연의 활동들이 있지만 그 원은 어찌되었든 폐쇄된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북촌방향>에서 남자의 방문으로 인해 한 자리에 있던 여자는 시간‘의’ 변화 가능성을 얻는다. 여자를 방문하며 남자는 시간 ‘안’의 변화를 겪는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는 우연이 이렇게 둘을 변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변화의 가능성들이 예쁘게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게도 둘의 시간이 만나는 그 순간들은 어딘지 외롭고 위태롭게 느껴진다. 시간의 닫힘 안에 있는 남자는 활동하고 시간의 열림 안에 있는 여자는 자리의 고정된 데에서 오는 어떤 충돌, 모순 때문인 것 같다. 이 두 영역이, 혹은 두 부류의 시간이 서로를 감싸안는 형국도, 여자의 시간이 남자의 폐쇄된 시간을 뚫거나 남자의 시간이 여자의 시간을 자기 안으로 꼭 붙들어 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의 달력과 여자의 달력은 일치하지 않는다. 방랑하는 무언가는 꽉 막힌 테두리 안에 있고, 정지된 무언가는 열린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고 품으려고 하는 데서 오는 기이함은 <하하하>에서 현재가 정지된 흑백 스틸 사진으로, 과거가 생동하는 활동으로 교차되며 불러온 신비롭지만 쓸쓸하고 충만하지만 텅 빈 정념만큼 마음을 울린다. 남자와 여자의 두 시간이 함께하는 순간, 여러 층위의 시간이 활동한다기보다는 시간의 축 자체가 산화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건 그들의 사랑이 그리하여 그 순간만큼은 영원하게 느껴진다는 인상과도 다르다. <북촌방향>이 형상화하는 시간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는다면 그건 시간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시간의 층위가 덩어리가 되어버린 순간 때문이다. 시간의 축이 사라진 자리에, 시간의 흐름이 주는 회한과 위로 같은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남자는 여자를 흐른다”
그때, <북촌방향>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프고 가장 아련한, 그 감흥을 말로는 다 설명해내지 못할 한 장면을 말해야 한다. 새벽녘 술집 소설에서 나온 성준, 보람, 중원, 영호, 예전이 택시를 잡기 위해 한 프레임 안에서 비틀거린다. 담배를 꺼내 물던 보람은 휘청거리다가 갑자기 도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프레임을 빠져나가고 영호가 그녀를 따라 화면 밖으로 나간다. 그녀를 데려다주겠다는 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화면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원을 성준과 예전이 부축해서 택시에 태우고, 택시가 떠난 뒤 둘은 조금은 어색하게 남겨진다. 눈이 내리는 중이며,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음악도 흐른다. 알코올의 충만한 밤은 지나가고 그 감흥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몸과 마음만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새벽의 차가운 공기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민망하지만 더없이 정직한 이 세속의 순간. 이 장면에 눈물이 날 것 같다면 당신은 술 마시는 영혼들의 가장 고독한 시간을 아는 자다. 이 장면의 영화적인 무엇이 새벽의 그 정념으로 우리를 이렇게 젖게 하는 걸까. 홍상수는 이 장면을 뒤로 돌리고 음악과 거리의 사운드는 원래대로 흐르게 하고, 흑백을 거두어 <북촌방향>의 예고편을 만들었는데, 나는 이 예고편을 보면서 비로소 이 장면의 감흥에 대해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예고편은 신기하게도, 시간을 인위적으로 거꾸로 감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술 취한 남녀가 뒷걸음질치는 작고 섬세한 동작들, 후진하는 택시의 움직임, 심지어 하늘로 올라가며 흩어지는 눈발까지 프레임 안의 모든 운동이 자연스럽다. 작은 인위를 통과하니 마법처럼 드러난 자연. 시간이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그 순간 프레임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그 어떤 미적 손상도 입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엄밀히 말해, 이 장면의 감흥은 시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이 사라진 자리에도 존재의 고유한 리듬으로, 그리고 위계 없이 서로의 리듬에 기대 흔들리는 우연의 운동에서 온다. 그 우연은 뭘까? 보람은 술집 밖에서 성준과 마주치자, “이런 우연은 뭘까요?”라고 묻고 성준은 “공기, 남자, 여자”라고 귀엽게 말하는데, 그 말을 흉내내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세계의 순수한 활동만으로 한없이 외로우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이 장면의 우연은 술, 남자, 여자, 눈, 그리고 밤과 낮 사이에 걸쳐진 새벽.
이제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얼룩처럼 보였던 장면들을 경유해서 마지막 장면에 도달할 때가 되었다. 소설2와 소설3 사이, 아무 여인도 등장하지 않고 영호와 성준 둘만이 연이어 담겨진 장면들이 있다. 소설2의 끝에 보람, 성준, 영호가 술집을 나설 때, 영호는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 난다”고 말하는데, 그때 카메라가 그에게 줌인한다. 마치 다음 장면에서 플래시백이라도 나와야 할 것처럼 뭔가 다른 시간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느낌이 나지만 다음 장면에서 성준과 영호는 정독도서관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지. 남자는 역시 용감해야 돼”라고 말한다. 그들의 현재 안에서는 별로 용감해 보이지 않는 두 남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런 다음 앞선 장면들과 어울리지 않는, 과도하게 줌으로 당겨 찍힌 산의 형상이 아주 괴상하게 일렁이며 화면을 채운다. 그러고 나서 영호와 성준은 영호의 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달걀 프라이를 먹고 중원을 만나기로 한다. 밖으로 나온 영호와 준상은 텅 빈 거리에서 때마침 민방위훈련에 걸리고, “중원이도 걸렸겠네”라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이질적이라고 꼽는 고덕동 경진의 집 장면보다 소설2와 소설3의 틈에 비집고 들어온 성준과 영호의 중의적인 대사들, 갑자기 끼어든 신묘한 산의 기운, 활동하던 모든 것을 갑자기 멈추는, 민방위훈련이라는 현실제도의 개입이 이질적이라고 느낀다. 소설3으로 돌아가기 전, 소설2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위에서 언급한) 술 취한 새벽, 택시를 잡는 남녀의 순간도 같은 맥락에서 덧붙이고 싶다. 이 순간들은 반복 순환하는 남자의 시간에 초현실적인 단절의 공기를 끼얹는 것 같고, 남자의 시간은 그 단절을 통해 폐쇄된 시공간 안에서 어떤 작은 이행을 시도하는 것 같다. 그런 이행으로 성준은 시간을 잃어가는 것일까, 되찾아가는 것일까. 그 이행이 폐쇄된 시공간의 남자를 어떤 식으로든 구원해주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성준의 행로를 보며 <북촌방향>의 남자는 여자를 흐른다, 는 이상한 문장을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도 싶어진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생기롭고 신기한 지옥의 마술
그러기 위해 예전과 영원한 이별을 약속하는 성준. 이제 그는 술집을 나와 예전의 빈자리를 돌아본 뒤,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몇몇 아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눈이 내린다. 그때, 그렇게 홀로 방황하던 성준 맞은편에서 사진기를 든 한 여인(고현정)이 걸어오며 그를 묘하게 쳐다보고 단어들이 내뱉어지는 순간 공기로 스르륵 사라지는 어조로 성준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경진, 예전과 다르다. 짧은 등장이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성준처럼 방랑하는, 누군가를 방문하는 자의 기질이 보인다. 성준과 우연히 세번이나 만난 여배우도 길 위를 떠돌았지만 그녀는 이를테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시간이 열린 원이건 닫힌 원이건 원의 시간을 살 때, 홀로 직선의 시간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게 그녀는 현실적인 시간적 층위를 자꾸 환기하게 만드는, 북촌의 영화적 시간에 어딘지 어울리지 못하는 돌출된 존재였고 그녀는 무엇보다 성준을 유혹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북촌을 헤매는 유령 같은 남자의 시간 앞에, 홍상수의 말대로라면 “그 자리에 떡하니” 나타난 유령 같은 이 여자는 반복의 회로에 갇힌 남자의 시간을 어떻게든 휘감을 것만 같다. 물론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또다시 여자의 시간을 흐를 것이다. 남자의 표정이 비애와 두려움, 이기지 못하는 어떤 감정의 뒤섞임으로 일그러진다. 불현듯 나타난 이 새로운 여인의 시간은 사내의 시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저들은, 그리고 우리는 이 생기롭고 신기한 지옥의 마술로부터 구원될 순간이 도래하기를 정녕 기다리는가. 거짓말. 그 거짓말은 무섭고 슬프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