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은 공교롭게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한다. 세계를 1일 생활권으로 압축한 항공 노선망은 향후 ‘MEV-1’이라 명명될 치명적 바이러스의 고속도로로 둔갑하고 역병은 삽시에 번진다. 수차례 전염병을 겪고 뒤늦게 재앙을 막아보겠다고 다른 종(種)을 생매장하는 패악마저 저지른 21세기 인류에게 역병에 관한 영화는 더이상 SF가 아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거의 뉴스도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역설적으로 그 작업의 효과는 좀비와 외계 신체강탈자가 나오는 영화보다 더 무서운 호러의 파장에 준한다.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르기도 망설여지는 이 영화의 양식이야말로 문화 모든 분야에서, 픽션과 리얼리티가 점근하고 있는 시대, 21세기에 걸맞은 공포영화인지도 모른다. 귀신영화를 보고 부적을 사러 가진 않지만 <컨테이젼>의 관객은 열에 일곱은 극장을 나와 손을 씻을 거다. <컨테이젼>이 섬뜩한 가장 큰 이유는 문제의 바이러스가 섹스도 수혈도 아닌 모든 접촉을 통해 옮는다는 설정이다. 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여행하기를, 보다 밀접하게 소통하기를 목표로 두고 열심히 달려온 문명을 향해 “우리는 서로 지나치게 연결돼 있다”라고 속삭이는 이 영화는 우리의 생존뿐 아니라 이상까지 위협하는 호러인 셈이다.
케이트 윈슬럿, 맷 데이먼, 기네스 팰트로, 마리온 코티아르, 로렌스 피시번, 주드 로, 엘리엇 굴드…. 러닝타임 내내 퀭한 안색으로 바이러스와 분투하는 극중 인물의 캐스팅은 감독의 전작 <오션스 일레븐>의 그것에 뒤지지 않음에도, 이 쟁쟁한 앙상블을 압도하는 <컨테이젼>의 원톱 주인공은 바이러스다. 극중 세계의 바깥에서 그러나 이 배우들은 승리한다. 설령 도중에 죽어 총총히 퇴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헷갈릴 정도로 불어난 몸매로 덤덤한 연기를 보여주는 데이먼, 흉한 병색을 띤 얼굴로 클로즈업을 견디고 적나라한 부검까지 당하는 팰트로, 이 건조한 영화에서도 눈물을 끌어내는 윈슬럿은 스타 아우라를 벗고 ‘현상’의 일부로 투신함으로써 재능과 자신감을 방증한다. 물론 스타 캐스팅의 실질적 효용은 엄연히 있다. 전문적 정보와 관료제 메커니즘의 묘사가 쏟아지는 이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관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이만큼 북적이는 출연진이면 영화 중간에 몇몇은 사라지겠구나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터. 정작 충격적인 대목은 주요 인물들의 죽음과 상실감을 다루는 영화의 가차없는 매너다. <컨테이젼>은 아내를 잃은 남자가 뒤늦게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영웅적인 질병관리요원이 희생되어 그녀의 시신이 비닐에 포장되는 비탄의 장면에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분노할 틈도 애도할 여유도 없는 마비 상태, 그것이 <컨테이젼>이 보는 재앙의 속성이다. 유념할 것은 극적인 감상을 최대한 배제한 조건에서도 이 영화가 인간성의 최선과 최악, 성스러움과 저열함을 노출시키는 데 성공한다는 점이다.
9월17일
22년간 22편의 영화를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최근 몇해 동안, 무슨 예고 홈런도 아니고 ‘예고 은퇴’라는 이상한 절차를 확인과 부인을 오가며 갈지자로 밟고 있다.<컨테이젼>을 보고나니 그 모든 소동이 혹시 장난인가 싶다. 영화를 곧 그만둘 감독이 이처럼 손가락 기교의 고급 훈련을 위한, 흡사 쇼팽의 에튀드 같은 영화를 만들까? 글쎄. 예술가답게 권태를 창의적으로 표현한 결과라고 설명한다면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9월19일
무려 반년 만에 촬영현장을 취재하러 갔다. “<씨네21>은 왜 우리 영화에는 이렇게 늙고 병든 기자를 보낸 거야?” 호탕한 B감독님이 대놓고 구박 하신다. 서럽다. 무수한 여행객이 오가는 KTX 역사가 로케이션이라 보조 출연자와 여행객들을 구분하기 어렵다. 현장을 통제하는 스탭들의 신경이 닳아 끊어지기 전에 무사히 촬영이 끝나기를 바라며 지켜본다. 저 배우 어디서 봤다고 토론하는 아주머니들부터 무슨 이야기냐고 기자에게 묻는 꼬마, 당신이 한때 영화배우였다며 조감독에게 추억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 훤칠한 노신사까지 행인들은 영화가 자기 일인 양 개입하고 싶어 한다. 그중 등산모를 쓴 한 장년의 여성이 감독님에게 다가간다. “혹시 작가세요? 내가 목사인데, 살아온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 싶거든.” 솔직하지 않은 대화의 기술을 아예 모르는 감독님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진지하게 대답한다. “아, 예.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 잘 안되면 다신 영화 못 찍을지도 몰라요.”
9월21일
<비포 선라이즈>(1995)에는 열차에서 만난 셀린(줄리 델피)에게 제시(에단 호크)가 케이블 TV쇼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었다. 전세계에서 365명을 선정해 그들의 24시를 1년 동안 실시간으로 연달아 보여준다는 이 기획에 제시가 붙인 가제는 <Life as it is lived>. 총명한 셀린은 “이 빌어먹을 삶을 지탱하려고 하는 평범하고 지루해빠진 일들? 그걸 누가 봐?”라고 반문했고 제시는 “으음, 난 ‘일상의 시’라고 부를까 했는데…”라고 풀죽어 응수했다. 제시의 꿈을 현실화한 사람은 뜻밖에도 리들리 스콧, 토니 스콧 형제다. 유튜브가 일상화된 21세기, 그들은 2010년 7월24일 하루를 기록한 영상을 공개모집해 장편영화 <라이프 인 어 데이>로 엮었다(날짜상 내가 응모했다면 모친 생신잔치 영상을 보냈을 게 분명하다). 아메리칸 홈비디오 같은 슬랩스틱부터 암 선고를 받은 아내에게 “가장 겁내던 일이 일어났으니 나는 이제 세상에 무서운 게 없어”라고 미소짓는 남편의 저릿한 독백까지 망라된 이 영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답다. 제작자도 일상의 파편이 양적으로 집적되어 숭고의 경지에 이르는 풍경을 꿈꾸었을 것이다. 한데 과연 양적 축적은 질적 상승으로 전화되는가? 10년 전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지의 채집이 수월하고 가벼워진 오늘날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숭고의 문턱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린다. 왜일까? 흥미로운 생각거리다.
9월23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상영될 <돈과 사랑>(<Money and Honey>)은 가족과 헤어져 대만에 몇년씩 체류하며 돈을 버는 필리핀 여인들의 사연을 13년에 걸쳐 갈무리한 다큐멘터리다. 필리핀은 해외 수출 노동인구 2위 국가이며 그 수는 국민의 1/10에 달한다. 그 여인들에게 돈과 사랑은 별개가 아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교육시키는 일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겠냐고 여인들의 거친 손발이 반문한다. 그녀들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사랑을 완성할 만큼의 돈을 벌려면 그녀들의 월급으로는 아주 오래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9월27일
<완득이>의 필리핀계 어머니는 <돈과 사랑>에 등장한 여인들의 ‘자매’일 터다. 매운 이야기를 담백하게, 느꺼운 주제를 쾌활하게 다루는 <완득이>에서 가장 굵직한 감정의 역학은 동주 선생(김윤석)과 완득(유아인) 사이에 놓여 있다. 원작도, 영화도, 영화 광고도, 동주가 꺼져줬으면 하는 완득의 소망을 라이트 모티브로 삼지만 이건 주지하다시피 귀여운 위장이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는 완득의 항의에는 “왜 나한테 신경 쓰세요? 왜 날 좋아하세요?”가 숨어 있다. 동주는 완득이 한마디도 안 진다고 툴툴대는데 말인즉 둘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으며 서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동주는 요컨대 완득이 끌어안은 온갖 진짜배기 좌절을 대신 집어던지는 미더운 안전그물이다. 사실, 영화 초반부터 완득은 전혀 위태한 전형적 반항아로 보이지 않는다. 외톨이지만 외로움에 친숙하고, 아빠와 삼촌을 보호하는 이 조숙한 소년의 혼란과 슬픔은 더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경쾌한 톤을 숙명으로 타고난 이 드라마에서, 짬짬이 숨을 고르고 그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카메라의 몫일 텐데 <완득이>는 원작보다 더 풍부해질 수 있는 이 기회를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