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The Idiot
라이너 사르넷 | 에스토니아 | 2011분 | 132분 | 플래시 포워드
고전은 마르지 않는 금광이다. 몇 번을 다시 만들고, 다시 만난다 해도 우리는 그곳에서 또 한 번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에서 날아온 새로운 버전의 <백치>는 이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순수한 영혼인 미쉬낀 공작을 통해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고뇌와 인간의 존재증명을 성찰한다.
간질 증상으로 요양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미쉬낀은 주위로부터 늘 바보라 놀림 받는다. 가진 것 없지만 항상 진실 되며 타인을 돕는 일에 망설임이 없는 탓에 손해 보는데 이골이 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백치처럼 보일 따름이다. 강한 자아로 뭉친 자존심의 화신 나타샤를 사랑한 미쉬낀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만, 나타샤는 그런 그의 마음을 외면한 채 부자인 로고진과 어울린다. 한편 귀족출신의 아글라야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백작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를 위로하지만 백작의 마음을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실망한다.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는 가운데 네 사람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비교적 충실히 원작을 재현한 라이너 사르넷 감독은 여타 <백치>의 각색작품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황폐한 마음속을 돌아보게 만든다. <백치>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다. 인물의 내면과 의식을 쫒아가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양식처럼 영화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둔다. 때론 환상적인 표현과 형식의 파괴도 서슴지 않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대변하는 미쉬낀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영화는 진실함이라는 빛나는 미덕 아래 뭇 인간들을 향한 연민을 품고 있는 미쉬낀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도상적으로 겹쳐놓는다. 동시에 인간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한 로고진과의 대비를 통해 현대인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그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