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조에 빠진 여배우> The Woman in the Septic Tank
마를론 리베라 | 필리핀 | 2011년 | 90분 | 아시아영화의 창
영화란 본디 백조의 운명이다. 스크린에 투영된 한컷 한컷의 프레임은 곧 수면 아래의 발버둥에서 창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발버둥이 어떤 목적을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영화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비루한 현실을 깨닫게 하거나, 아름다운 감동을 전하거나, 세계적인 명감독이 되거나. 영화가 그리는 것은 이 모든 욕망이 겹쳤을 경우에 벌어질 법한 소동이다.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는 필리핀의 한 빈민가에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라면 한 봉지로 7명의 아이들이 한끼 식사를 때워야 하는 가족이 살고 있다. 생계를 꾸려야 하는 엄마는 딸의 몸을 씻긴 뒤 소아성애자인 백인 남성에게 매춘을 알선한다. 이 정도의 줄거리를 들은 영화 속의 누군가가 말한다. “오, 아름다워!”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이러한 비극적인 영화를 만들려는 독립영화 감독과 프로듀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목표는 단 하나. 국제영화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영화가 이들의 야심을 꼬집는 방식은 먼저 그들의 예술과 실생활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영화를 찍고 있는 그들은 스타벅스에서 어떤 커피가 맛있는지를 따지고, 아이패드 충전기가 없다며 짜증을 내고, 맥북으로만 시나리오를 쓰려 한다. 그들이 써가는 시나리오도 수상을 위한 방향으로 바뀐다. 매춘에 팔리던 딸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아들로 바뀐다. 국제영화제의 성격에 따라 장르 또한 바꿀 수 있는 이들은 애초에 사실적인 톤의 드라마로 구상된 영화를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극사실적인 영화로, 다시 할리우드의 스코어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영화로 변신시킨다. 하지만 한편의 영화는 감독과 제작자의 야심만 감당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 캐스팅하려 한 필리핀 최고의 여배우는 더이상의 성공이 무의미한 탓에 젊은이들의 독립영화를 이용해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받으려 한다(실제 필리핀의 국민여배우인 유진 도밍고가 영화 속 영화의 엄마와 출연 제의를 받은 여배우로 1인2역을 한다). 말하자면 국제적 성공의 수단이 된 독립영화란 개념과 이를 쫓는 사람들의 좌충우돌 수난극인 셈. 또한 현재의 영화가 갖는 아이러니한 가치를 통해 씁쓸한 웃음을 전하는 한편, 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수많은 영화들의 이면을 의심케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