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복> Hara-Kiri: The Death of Samurai
미이케 다카시 | 일본 | 2011년 | 126분 | 아시아 영화의 창
미이케 다카시는 요즘 일본의 시대극이 있는 창고를 뒤지느라 바쁜 것 같다. 작년 고전활극인 쿠도 에이이치 감독의 <13인의 자객>을 리메이크 한 데 이어 이번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1963년 작 <할복>의 리메이크다. 그의 영화에서 으레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의 절정을 기대했던 관객들이라면, 미이케 다카시의 이 같은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이케 다카시 본인에게 적어도 이 작업은 먼지 폴폴 나는 필름 뒤지기에 그치는 건 아닌 것 같다. 컬트 감독으로서 재기를 보여주는데 급급한 대신 이제 그는 일본의 원류이자 어쩌면 자신 영화의 근간이 된 일본 정통 사극을 되살리려 한다. 영화는 전란이 한창인 전국시대 직후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명망 높은 사무라이 가문에 찾아와 ‘할복’을 청하는 낭인 한시로. 이즈음 가난에 찌든 사무라이들에게 할복 사칭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한시로의 결심이 곱게 받아들여질리 없다. 한시로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기까지 병든 딸과 손자, 그리고 무사 사위의 가슴 아픈 사연을 하나둘 전하기 시작한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원작에서 보여지듯 <할복>은 사무라이들이 펼치는 화려한 무술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낭인 한시로와 주군의 자리를 대신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고문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플래시백으로 처리되는 한시로의 딸과 가족들의 이야기 역시 전형적인 신파극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시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액자구성의 이야기는 당시 권력층의 사회적 부조리, 무사도의 허와 진실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설득력 있는 대사야 말로 <할복>이 보여주는 진짜 ‘액션’이다. 한시로를 연기한 이치카와 에비조와 고문 야쿠소 코지의 ‘대사 배틀’이 이 긴장감을 이어나간다.
3D는 <할복>을 뒷받침하는 지원군이다. 블록버스터에서 사용되는 화려한 3D 기술과 달리 이 영화의 3D는 좀체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두 남자의 대화가 진행되는 중첩된 일본 가옥구조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거나, 의상의 결을 살려주는 것이 가장 막중한 역할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3D 영상이 주는 임팩트는 꽤 강하다. <할복>은 고전의 탐구라는 감독의 대의명분과 새 영화에 대한 또 다른 갈망이 합쳐져 만든 가장 최적화된 형태의 사무라이 액션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