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Guzaarish
산자이 릴라 반살리 | 인도 | 2011년 | 126분 | 아시아 영화의 창
한때 추앙받는 마술사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에단(리틱 로샨)은 14년 째 병상에 누워있다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 전역의 전신마비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영웅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단은 자신이 전하는 희망이 곧 상처를 잊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그의 삶은 사실상 관 속의 삶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에단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인도 정부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부에 안락사를 청원하자, 그를 통해 희망을 얻던 수많은 사람들, 그의 친구들, 그리고 14년 간 모든 걸 포기하고 에단의 곁을 지켰던 소피아(아이쉬와리 라이)는 슬픔과 분노에 젖는다.
<청원>을 연출한 산자이 릴라 반살리는 <블랙>의 그 감독이다. 지난 2002년, 100억원이 넘는 예산과 화려한 춤과 노래, 3시간 4분에 육박하는 전형적인 발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인 <데브다스>를 연출했던 그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각색한 휴먼드라마인 <블랙>을 통해 인도영화에 새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블랙>에서 춤과 노래는 지양하고, 인물들은 영국식 영어를 쓰며 공간의 색깔에서도 지역적 특징을 멀리했던 그는 <청원>에도 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상영시간은 2시간 남짓, 인물들은 영어를 쓰고 로케이션 지역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인도의 ‘고아’다. 행복추구권으로서의 안락사를 소재로 삼은 만큼, 영화 속의 춤 또한 기존의 발리우드 영화만큼 화려하지 않다. 인도에서 댄스의 화신으로 불리는 배우 리틱 로샨이 전신마비 환자로 등장한다는 설정 또한 발리우드의 전통적인 색깔에서 벗어나려는 감독의 의지일 것이다.
뮤지컬 시퀀스를 기대하는 발리우드 영화의 팬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으나, <청원>은 범상치 않은 미적 감각과 우아함으로 압도하는 영화다. 주인공 에단이 마술쇼를 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 그리고 소피아가 에단을 위로하려 춤을 추는 장면이 선사하는 고혹적인 매력이 그 중의 백미다. 에단의 지속적인 청원과 이를 거부하는 법원이 대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에단의 고통과 그를 사랑하는 소피아의 아픔 또한 강렬한 드라마를 통해 묘사된다. 삶과 죽음, 행복과 슬픔, 사랑과 이별 등등 에 대한 영화의 해석은 분명 가을의 공기와 어울릴 것이다. 아이쉬와리아 라이와 리틱 로샨에게는 <조다 악바르>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