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영화와 긴긴 크레딧이 끝나고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농담 반 진담 반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대충 사는 동안 저분은 또 저기까지 가셨구나.” 정말이다. 인간의 고통을 즐겨 그리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수사의 영역을 개척했다. 핍박한 인생을 짊어진 인물들, 죽음과의 시간 다툼, 인종과 계급의 질서를 새로 그려넣은 1세계의 지도까지, <비우티풀>은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감독의 속도가 느껴지는 영화다. 그러나 그것은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의 결과물이다. 10월12일 CGV대학로에서 열린 <비우티풀> 시네마톡 행사에 참석한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씨네21> 주성철 기자는 마라톤을 중계하는 캐스터와 해설자처럼 번갈아가며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비우티풀>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았다.
이냐리투 감독이 꿈꾸고 하비에르 바르뎀이 빚어낸 이번 작품의 발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성철 기자가 당시 상황을 간단히 전달했다. “2001년에 이냐리투는 <아모레스 페로스>로, 바르뎀은 <비포 나잇 폴스>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때 수상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루저 파티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고 다음에 우리 영화 한번 하자고 했던 것이 10년 뒤에 <비우티풀>로 나오게 된 거다.” ‘한번 하자’는 말을 10년이 지나도 잊지 않은 두 사람의 끈기와 집요함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비우티풀>은 복잡한 국제정치 문제를 무섭도록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영화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설명대로 바르뎀이 연기한 욱스발이란 캐릭터는 “프랑코 정권 시절에 억압당했던 카탈루냐 지방 사람으로 동화정책 때문에 교외로 쫓겨난 세력”이며 “스페인 사람이지만 소수민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가 아프리카나 중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계급의식만이 아니라 지역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
<비우티풀>은 감독의 전작 <바벨>과 같은 핏줄의 영화다. 다양한 국적과 계급의 인물군,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내러티브의 네트워킹, 마지막으로 섬뜩한 교차편집까지. 하지만 전작과 표면적으로만 비교한다면 <비우티풀>은 공간적 배경의 이동 내지는 축소로 새롭게 보인다. 물론 그 공간에 담기는 이야기는 전작들에서 반복했던 내용들이다. 주성철 기자는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들에서는 여러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단 한번의 사건으로 얽히는 경우가 많은데, <비우티풀>의 인물들도 중국, 세네갈, 스페인으로 국적이 다 다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간을 분산시키지 않고 특정한 한 공간, 바르셀로나에서 만나게 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안에서 다 만난다”고 공간적 변형을 요약했다. 그런데 이냐리투가 본 바르셀로나는 우리가 평소 알던 따뜻하고 자유로운 지중해 도시가 아니다. 감독이 도시를 묘사하고 그 분위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확실히 예상을 빗나간다. 주성철 기자 역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바르셀로나를 기대했는데 흡사 나홍진의 <황해>에 나오는 서울처럼 지옥 같은 풍경이어서 놀랐고”, “<바벨>의 도쿄 에피소드가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번에도 새로운 도시 바르셀로나를 잘 담아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이 싹 씻겼다”며 안심했다.
불신의 나락은 가족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주성철 기자가 먼저 운을 띄웠다. “<바벨>에서는 마지막에 가장 어두웠던 순간에 가장 밝은 빛이 되어준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고, <비우티풀>에서는 아버지 실명까지 언급하면서 이 영화를 나의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했다. 다음 신작에 따라 가족 3부작이라는 제목도 붙일 수 있을 정도다. 욱스발은 <21그램>의 베니치오 델 토로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둘 다 거칠고 남성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가진 아버지들이다.” 하지만 <비우티풀>의 아버지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붕괴된 가족의 잔해를 아무리 끌어안고 이어붙여도 욱스발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이어받은 김영진 영화평론가 역시 “국가가 국민을 방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후의 보루로서의 가족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한 위협감을 준다”고 지적했다. “이헤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 (욱스발의) 아이들이 보지 않나. 자기 엄마한테 한번도 못 느껴봤던 걸 느끼는 거다. (아들) 마테오가 맞은 다음날 욱스발이 애들을 데리고 부인을 떠나는 장면도 절묘하게 찍혀 있다. 부인과 나머지 가족 사이에 벽이 딱 가로막고 있다. 벽이 프레임을 완전히 갈라놓고 있는 거다. 그전에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먹는 장면과 비교해보면 위협감이 한층 더한다.”
욱스발이 견뎌내는 세계를 목격한 뒤에는 현실을 낙관할 힘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함부로 비관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비우티풀>이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영화”라면서 깊은 위로를 건네는 장면으로 세네갈 이주민 이헤와 학교를 마친 욱스발의 두 아이들이 멀찍이 떨어져 함께 걷는 대목을 꼽았다. “(현실에서) 그들은 같이 걸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렇게 떨어져 걷다가 세 사람은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때쯤 합류한다. 그 뒤 컷이 바뀌면 이헤가 마테오의 상처 위에 붙어 있던 밴드를 떼어내주고 있다. 아문 상처를 어루만지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덧붙여 그 장면에 근거해 “이런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구원받기를 바라게 되지만 구원은 수동적인 개념”에 그친다며 “이 영화의 정서적 주제는 연민”이라고 말한 감독의 말에 동의했다. 나중에 어떤 관객은 이헤가 세네갈로 떠나지 못하고 결국 욱스발의 집으로 돌아왔는지가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함께 주성철 기자 모두 “돌아왔다고 믿고 싶다”며 열린 결말 속에서 일말의 희망에 더 주목했다.
영화를 빛내는 바르뎀의 아우라
물론 카메라의 포커스가 불행에 맞춰져 있든 행복에 맞춰져 있든 <비우티풀>의 양극단을 아우르는 최고의 피사체는 역시 바르뎀이다. 주성철 기자는 이냐리투 감독이 바르뎀의 아우라를 그대로 영화에 끌어들여 극대화했다고 보았다. “<바벨> 때는 이냐리투 감독이 브래드 피트에게 관객이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도록 연기를 해달라고 주문했다더라. 반대로 <비우티풀>에서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거대한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쓰고 있어서 전혀 다른 느낌이다.” 반면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감독과 배우 모두 욱스발의 밑그림으로부터 바르뎀이라는 배우의 흔적을 지워내려 애썼다고 보았다. “바르뎀이 만들어낸 캐릭터만 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의 KO승이다. 그는 코맥 매카시의 필력보다 스크린에서의 물리적 현존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느끼게 한다. 그런 배우가, 물론 엑스트라를 잘 심어놔서이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묻힌다. 저게 연기를 안 하는 연기의 경지다. 그에 비하면 <바벨>에서 브래드 피트는 별로 안 묻혔다.”
두 진행자의 느슨하고도 날선 논평이 길어지면서 관객의 질문은 늦게서야 시작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엉이, 나비 등의 상징적 의미를 묻는 질문이 많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속 상징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약한 이미지가 되어버린다”며 “각자의 직관을 믿으면 될것 같다”는 말로 답을 피했다. 그가 “화려한 레토릭의 영화”라고 평한 <비우티풀> 같은 작품을 보고 나서는 이미지를 언어로 무리하게 번역하는 데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주성철 기자 역시 “감독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을지 궁금하다”며 열린 결말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