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길모퉁이에서 향긋한 계피 향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시나몬 롤, 모든 게 얼어붙은 남극기지에서 대원들의 몸과 마음을 녹이는 라멘 한 그릇, 이름 모를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서 돈이 아닌 물건과 교환되던 소박한 일본식 빙수, 오래 전 혼자 머나먼 이국 땅으로 떠나버린 엄마가 만들어 준 바나나튀김. 영화 속에 나온 음식들은 맛도 모양도 사연도 다르지만 단 한사람의 손을 거쳤다. 도쿄 출신의 이이지마 나미는 니신(NISSIN)을 비롯한 일본 광고 음식 스타일링을 시작으로 어느새 일본 영화에 나오는 음식의 스타일링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대명사가 되었다. 영화에 나왔던 음식의 레시피를 엮은 책과 그 밖의 요리책들이 이미 국내에 여러 권 출시되어있고 영화 이상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대표작인 <카모메 식당> <남극의 쉐프> <안경> <수영장>이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음식이 단지 화사한 소품처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어지게 하고,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양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수영장>
이이지마 나미가 촬영 3개월 전부터 시식회를 거쳐 완성했다는 영화 속 요리들은 과연 열대의 재료를 일본만의 느낌으로 탄생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가게마다 튀김 가루의 배합, 기름의 혼합 비율과 끓이는 온도까지 저마다의 레시피를 보유하며 ‘덴뿌라’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일본답게 바나나튀김이 눈에 띈다. 거창한 음식은 아니지만 식탁위에 올려놓으면 아무 때나 집어먹곤 하던 찐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친근함, ‘튀겨진 과일’이라는 독특함과 신선함도 고루 갖추고 있다.
“동남아의 강한 햇살을 모두 체에 거른 듯한 담백한 빛, 주변의 소음을 모두 집어삼킨 듯 고요히 운행 중인 세탁기, 타이의 향신료를 빼버린 듯한 정갈한 음식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일본 같은 타이에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화정 기자 (2011.03.30)
<남극의 쉐프>
가벼운 폐소공포증과 향수병을 감기처럼 달고 사는 남극 기지 대원들. 그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것이 있다면 아침 체조, 일본에 있는 가족과의 전화통화, 그리고 하루 세 끼니이다. 특히 모든 게 얼어붙은 남극기지에서 끓여진 라멘 한 그릇은 익숙한 육수 냄새만으로도 평범한 일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대원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고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주방장 니시무라는 말이 없고 수줍다. 일본의 다른 음식영화나 만화,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앞치마 두른 사무라이 같은 비장함도 없다. 그는 타인을 배려하고 유머가 있으며, 무엇보다 음식 만드는 즐거움을 안다. 니시무라 덕분에 대원들은 동토의 남극에서, 오히려 일본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맛의 호사를 누린다. 이 통쾌한 역설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황두진 건축가 (2011.07.14)
<카모메 식당>
영화 속에서 시나몬 롤은 마법 같은 음식이다. 바깥에서 낯선 눈길로 식당을 바라보던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계기였고, 토미와 사치에가 처음으로 힘을 합쳐 만든 음식으로 관계에 깊이를 더해주기도 했다. 시나몬 롤을 시작으로 일본의 평범한 가정식을 헬싱키 사람들이 먹으러 오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보던 관객 역시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무엇인가 ‘먹고 싶다’고 식욕을 돋우게 되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상영되면서 무작정 사표를 날리고 핀란드로 떠난 또 다른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가 많았을 것 같다. 하긴, 지금도 <겨울연가> 성지순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차원이 다른 이 영화의 충동질은 오죽할까. <카모메 식당>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서울에 주먹밥 전문집까지 생겼다(그중 하나는 아예 이름도 카모메다).” 박찬일 쉐프 (2009.05.27)
<안경>
보다가 도중에 잠들 것처럼 평온한 영화 <안경>의 극적인 순간은 주인공 모두가 말없이 음식을 먹을 때 찾아온다. 푹 삶아진 바닷가재의 껍질이 바삭하고 잘리는 소리, 탱탱한 살을 한입에 가득 넣고 행복하게 베어 무는 표정, 차가운 맥주 컵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빙수에 들어가는 팥이 졸여지는 시간 등 먹으려고 사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는 것이라는 의지로 가득 채워진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청년 요모기(가세 료)가 읊는 “봄바다는 꾸벅꾸벅 조는 것 같다”는 시구였어요. 영화가 시작할 때 두 남녀가 각각 “왔다”라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나, 전체 구조가 사쿠라상의 도착과 떠남,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의 도착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그렇죠. 이건 봄맞이 영화야.” 이동진 평론가 (2007.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