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됐구나, 이게 <완득이>를 보면서 첫 번째 느낀 점이다. 주인공 도완득(유아인)의 엄마는 필리핀인이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엄마가 필리핀인이었던 영화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하고는 다른 문제다. 가난해서 한국에 시집 온 동남아 여성이 엄마로 등장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다. 결혼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날아갔던 노총각(<나의 결혼원정기>) 이야기 훨씬 전에 이미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신부들이 있었고 이들이 이젠 청소년기를 맞은 자녀를 둘 나이가 된 것이다. 최근 몇년 동안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국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의형제> <반두비> <방가? 방가!> 같은 영화들). 동료로서, 친구로서,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엄마는 생소하다.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그렇다. <완득이>는 다소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관객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모자 인정 드라마에 눈물 흘리게 만드는 솜씨가 있다. 이 글은 관객의 호흡과 감동을 조절하는 솜씨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살피려다 보니 소설 <완득이>와의 대조도 불가피해졌다. 감독이나 제작사 모두 원작에 충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매체 전환의 전략도 궁금해졌다.
원작 소설에 없는 부분은 어떻게 보완되었나
이완과 긴장의 빠른 중첩, 이 영화가 웃음과 감동을 한 덩어리로 묶는 방식이다. 영화 후반에서는 호흡이 다소 느려지지만 중반까지 영화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마치 손이 빠른 권투선수가 연타로 잽을 날리듯 관객의 감정을 연속해서 움직이게 만든다. 완득이가 17년 만에 엄마를 처음 만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완득은 담임 똥주 선생(김윤석)이 이웃집 여성 무협작가를 훔쳐보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다음날 학교에서 선생을 만나자 실실 웃으며 혼잣말을 한다. 그의 혼잣말을 이해하는 관객도 함께 웃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다. 똥주 선생은 완득에게 엄마 소식을 전하고, 굳어지는 완득의 표정처럼 관객의 마음도 무거워진다. 그날 밤, 엄마를 마주칠까 긴장하는 완득은 교회 앞에서 동남아인 여성을 만나고 짧은 순간 정적이 흐른다. 완득도 관객도 불과 2, 3초에 불과하지만 그 여성을 완득의 엄마로 인지하면서 긴장이 조성된 것이다. 이어지는 “내 부인입니다”라는 인도인 핫산의 대사는 허를 찌르며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 웃음기가 채 가시기 전 다시 진짜 엄마와 조우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완득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똥주 선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마무리되는데 몇 차례의 자잘한 긴장과 이완이 큰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선택과 보완, 이것은 원작을 영화화하는 어떤 경우라도 필요한 전략이겠지만 <완득이>의 경우 원작에 충실한 편이기에 자세히 볼 만하다. 사건과 대사를 상당 부분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원작에 없는 부분을 보완한 면이다. <완득이>는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소설보다 직접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위에서 본 처음 엄마를 만나는 시퀀스는 거의 소설의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편집에 의해 웃음과 감동이 증폭된 예이다. 문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문자 텍스트와 달리 영화에서는 필요한 부분을 선택적으로 보여주므로 코미디 효과 창출이 용이하다. 이와 같은 예도 많지만 원작에 없는 것을 추가하여 감정을 보다 극단으로 밀고 가는 장면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설에서 보이는 시니컬한 태도를 누그러뜨리면서 구체적인 대사와 상황을 추가하는 방법을 쓴다. 하나의 예로 완득이 엄마에게 구두를 사주는 장면이 있다. 신발 가게 주인이 “저짝 사람” 같은데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묻는 것은 소설과 영화가 동일한데 영화에서 완득은 “엄마예요”라는 대사를 마침내 하고 만다. 가슴 찡한 부분이고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비슷한 예로, 아버지가 완득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녀석… 다리 긴 것 좀 봐”라고 하는 대사도 소설과 영화에 공통된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완득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업게 한다. 키 작은 아버지가 다리 긴 아들에게 업혀 그 말을 할 때 더 극적이 된다. 이 두 가지가 대사와 상황 추가에 의한 감동 배가 방식이라면 보다 직접적인 설명에 의해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도 있다. 똥주 선생을 죽여달라는 완득의 기도를 활용하는 장면이 거기 해당된다. 관객은 완득의 기도에 폭소를 터뜨린다. 완득의 기도에서 살의보다 어리광을 느끼기 때문에 공감의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몇 차례 완득의 기도를 되풀이하는데 영화에서는 똥주 선생을 직접적으로 개입시켜 코미디를 부각시킨다. 완득의 기도 내용을 전혀 모르는 똥주 선생이 “완득아, 기도는 오래 오래 정성껏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클로즈업숏은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긴 대목이 된다. 기도를 활용한 코미디는 완득이 똥주 선생을 업고 뛰는 장면에서도 연출된다. 소설에서 똥주 선생은 여전히 기도 내용을 모른 채 완득에게 업혀 있지만 영화에서는 똥주 선생이 드디어 무슨 기도인지 알게 만들어 웃음을 준다.
캐릭터 변경과 강화, 캐릭터 단순화가 영화적 통일성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라면 새로운 캐릭터 창조는 주제를 명료화하여 상업적인 영화로서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장치다. 완득 주변인물 중 여자친구 정윤하와 킥복싱 체육관 관장은 소설 속 캐릭터를 단순화한 경우다. 반에서 1등하는 윤하와 완득이 사귀는 과정이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수월하게 진행된다. 윤하는 쉽게 완득에게 마음을 열고 완득의 고백도 빠르다. 소설에서 둘의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로 윤하 엄마를 등장시키지만 영화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 체육관 관장 캐릭터 역시 영화에서는 단순화되어 완득을 이끄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에 집중된다. 소설에서는 오히려 똥주 선생과 비슷한 면모를 보이고 개인사도 설명되지만 영화에서는 그려지지 않는다. 윤하와 체육관 관장은 영화적 집중을 위해 캐릭터가 단순화된 경우지만 인도인 핫산은 완전 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는 알고 보니 핫산이 고용주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폭로되나 이 부분은 영화에서 삭제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친화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에서 아마도 이 부분은 소설대로 다루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장애인, 빈곤층, 외국인 노동자 등과 같은 소외계층을 바라보는 확고하고 일관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선하고 긍정적인 이런 태도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지만 <완득이>의 한계이기도 하다. 완득이가 엄마를 인정하는 과정이 그렇다. 엄마를 만나기 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완득은 만나자마자 엄마를 받아들인다. 일단 만나고 난 뒤에는 회의가 없다. 문제아라는 애초의 설정과 달리 완득이는 너무 착하고 따뜻한 아이다.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편에 서 있는 똥주 선생 역시 그런 면에서 같은 부류다.
완득과 똥주 선생,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완득과 똥주 선생, 이 둘을 동궤에 놓는 관점은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진다. ‘자습’이라 써놓고 교탁에 엎드려 자는 똥주 선생과 한 프레임 안에서 완득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소설에는 없는 무협작가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멜로 라인 추가를 통한 재미를 주기 위해서인데 결과적으로 완득과 똥주 선생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완득과 윤하의 연애와 병행하여 똥주 선생과 무협작가의 로맨스가 펼쳐진다. 심지어 영화에서 똥주 선생은 완득에게 연애 비법을 배우기도 한다. 링 밖에서 링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이 완득과 링 안에서 살아오다 링 밖으로 나온 선생 똥주는 닮은꼴이다. 둘은 반항적이고 거칠어 보이지만 링을 무시하는 인물들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완득이>는 링의 경계를 사유하지만 링을 존중하는 상업영화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다. <완득이>의 미덕은 관객으로 하여금 링을 흔드는 파격에서 오는 쾌감을 맛보게 한 뒤 링의 진동이 잦아들 무렵 안전하게 링 안으로 들어오게 인도하는 상업영화의 규칙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폄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