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장서희] 독기 대신 여유 장전
2011-11-10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물의 비밀> 장서희

절룩거림도 아니다. 저벅거림도 아니다. 사진 촬영을 마친 장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단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뒷모습을 담아낼 단어를 쉬이 정하지 못하겠다. 근육 없이 마른 다리가 겨우 하이힐을 들어 옮기듯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그 영상을 멈추면 몸은 중력의 법칙에, 삶은 풍화작용에 내맡긴 여자의 실루엣이 드러날 것이었다. 이제 그녀의 나이 마흔, 반 접어 딱 스물이었다. 그 곱절의 세월을 생각하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아한 기분이 든 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막 녹음기 버튼을 눌렀을 때다. 생의 그늘이 조금도 드리워져 있지 않은 낯빛이었다. 관리를 잘한 얼굴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굴곡에 닳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꼭꼭 숨겨도 주름 사이에 남아 있어야 할 찌꺼기가 보이지 않았다. 드물게 깜빡이는 눈에서는 당장의 피곤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눈썹과 발가락, 상체와 하체, 머리와 꼬리를 따로 놀릴 줄 아는 배우일 것이다. 그 인상이 드라마의 바스트숏 안에서 나이를 먹은 배우의 모습과 어울렸다.

1980년대, 장서희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뽀뽀뽀>의 뽀미 언니였다. 1990년대, 장서희는 이런저런 TV드라마를 인기척 없이 드나들었다. 시쳇말로 그녀의 ‘포텐이 터진’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002년 <인어 아가씨>, 2008년 <아내의 유혹>으로 두번에 걸쳐 그녀는 대중의 인식 속에 복수의 화신으로 자리잡았다. 그녀의 전성기는 꽃다운 20대가 아니라 독기가 풀풀 날리는 30대였다. 그러니 불혹의 나이 마흔에 고른 영화 <사물의 비밀>에서 마흔살의 여교수로 나와 스무살의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그녀는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으로 보인다. “한 10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왜 벌써 마흔이냐고”라는 대사는 극중 인물 혜정의 말이기 이전에 온전히 배우 장서희 자신의 말이다. “다른 대사들도 공감 가는 게 많았지만 그 대사는 그냥 제 얘기였어요. 제가 늦깎이였잖아요. 지금은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사람이기에 욕심을 부릴 때도 있잖아요. 마음 한구석에는 이왕이면 더 젊고 예뻤을 때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속상한 마음이 있죠. 농익은 연기, 원숙미, 그런 건 다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젊음이 더 예쁘고 좋잖아요.”

마흔, 자신에게 관대해지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그러나 ‘한’의 정서가 탈색되어 있었다. 차라리 ‘분수’를 넘지 않으려는 깍듯함이 묻어났다.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는 ‘40’”이라는 친구의 말에 별달리 흥분하지 않았던 극중 혜정처럼 그녀는 “제 위치에서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어요. 딱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이라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슬럼프를 거치며 자신에게 더 엄격해지는 사람이 있고 더 관대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후자임이 분명했다.

시간을 되돌려보면 장서희는 복수심에 불타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이상할 정도로 낙천적인 구석이 있었다. 복수의 칼을 가는 모습이 마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 이 뻔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볼 테야?’라고 묻는 듯했다. 그녀의 연기는 캐릭터의 가면과 배우의 얼굴을 밀착시키기보다는 멀찍이 떨어뜨려놓는 연기였다. 그것이 극 안쪽으로의 몰입을 요구하기보다 극 바깥쪽으로의 유희를 부추기는 ‘막장’ 드라마의 성격과도 맞아떨어졌다. 실제로도 그녀는 스스로 캐릭터의 우물 속으로 깊게 잠기지 않는 배우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마 한국과 중국으로 찢어져 있는 스케줄 속에서, 냉탕과 온탕을 빠른 속도로 오가는 캐릭터들 사이로, 어떻게든 인간 장서희를 남겨두기 위함일 것이다. “어떤 캐릭터에 몰입해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어떻게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나를 버리고 살겠어요. 저는 연기를 테크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캐릭터에서도 잘 빠져나오는 편이고요. 벼락치기를 잘하는 쪽이랄까요.”

작품 하나하나보다 작품 사이사이를 생각하는 장서희는 다른 많은 배우들처럼 해외에서 휴식을 가진다고 했다. 휴가지에서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관찰’이다. 연기하는 동안은 자신에게 쏠려 있던 시선의 방향을 바꾸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람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해외 나가면 아무래도 국내보다 움직이기 편하니까 재래시장이나 뒷골목이나 사람 사는 모습이 보이는 곳을 찾아요. 각양각색의 각 나라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든지. 가끔 재미있는 사람을 보면 언젠가 저 역할을 써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죠. 나중에 어떤 역할을 맡을지 모르니까.”

마지막 문장을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휴식보다 일에 대한 갈증이 더 느껴져 멈칫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생계형 배우’라 부르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종종 ‘인생 뭐 있나요?’라는 식의 그녀의 호방한 자세는 확실히 생활인의 그것이기는 했다. 중국 진출이 경제적 풍요만 가져다줄 뿐 아니라 욕망의 분출구도 되지 않는가 물었을 때조차 “에이,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런 거 없어요”라고 손을 내저었던 그녀다. 하지만 방금 전의 표정에서 생계의 영역 밖을 기웃거리는, 배우로서의 호기심이 고개를 내민 듯했다.

장서희가 꿈꾸는 앞으로의 연기 인생은 단순하고 방대하다. 두 단어를 나란히 놓은 이유가 있다. 그녀가 “예전부터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씨가 했던 ‘옥님이’ 같은 인물을 꼭 연기해보고 싶었”다고 말하기에, 연기 인생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서의 계산은 아닌가 싶어 왜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참으로 간단명료했다. “못 해본 역할이니까요. (웃음)”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인어 아가씨>를 막 끝낸 직후를 꼽았다. “<인어 아가씨>를 찍었을 때가 황금기였죠. 그런데 그때 말고 찍고 난 직후로 돌아가고 싶어요. 드라마 끝내고 제가 너무 몸을 사렸어요. 이제부터 나 관리해야 하나보다 생각한 거죠. 다작이 나쁜 것도 아닌데, 고르지 말고 다 해볼 걸 그랬죠.”

중국 진출에서 느끼는 어떤 만족감

<인어 아가씨> <아내의 유혹>을 다 놔두고 정작 장서희가 “한풀이했다”고 생각하는 드라마로 <산부인과>를 꼽은 것도 그래서 당연해 보였다. “의학드라마를 너무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미니시리즈 여자주인공은 20대 배우만 하는 것이 하나의 룰처럼 존재하는 상황에서 서른아홉의 나에게 서른의 여의사 역이 맡겨진 것도 좋았어요. 어린 배우들과 같이 연기하면서 ‘그래, 나의 승리야!’라고 생각했었죠. (웃음) 복수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를 털어낼 수 있었던 드라마이기도 했고요.” 그녀가 중국 진출에 기꺼운 이유도 실은 “한-중 교류”만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중국에서 신상명세에 구애받지 않고 외국 배우 ‘장루이쉬’로 활동할 수 있다는 데 만족을 느낀다. 내년 2월 <베이징방송>에서 방영을 시작할 <서울 임사부>에서는 요리 사부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로, 지금 촬영 중인 <수당영웅>에서는 황후로 나올 예정이다. 그녀에게 은아리영과 민소희에 대한 기억은 다 증발해버리고 없다. 20대 내내 흘렸던 눈물도 마찬가지다. “<무릎팍 도사>에서 말했던 MBC 화장실 같은 곳요?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울 일이 거의 없어요.” 그녀가 다시 한번 종아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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