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인디라마]
[김영진의 인디라마] 이 시대의 분노를 외치다
2011-11-17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 일방적인 재현에도 가슴 먹먹해진 이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연상호의 <돼지의 왕>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예산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지만 이 스토리가 애니메이션에 맞는가, 라는 물음이 첫 번째로 든 생각이고 바닥까지 내려간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절망은 개연성이 있는가, 라는 물음이 그 다음 든 생각이며 이것은 새로운 세대의 윤리적 창작 태도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라는 게 세 번째로 든 생각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물음에 내 멋대로 내린 결론은 그럴 수 있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곧바로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지금부터 좀 돌려서 얘기해보려 한다.

잔혹하다는 걸 굳이 홍보문구로 내세울 만큼 <돼지의 왕>은 사는 게 지옥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중학교 시절 아이들의 폭력적인 먹이사슬에서 학대받는 평범한 아이들의 일상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니, 나아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 겪은 불행을 더 큰 그릇에 담아 재연한다. 살아봤자 어렸을 때 겪은 약육강식의 질서는 더 공고해지더라는 절망이 결말에 담겨 있다. 회고조의 향수가 끼어들 틈도 없고 희망에 대한 일말의 판타지도 없다.

나는 이런 스토리 전개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현실의 재현이라면 너무 극단적인 방향에서 축조한 일방적인 재현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영화에서 다뤄진 폭력적인 학교 현실을 가감의 경중만 있을 뿐 비슷하게 체험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럴 것이며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개는 그 현실에 겉으로는 적응하는 척 살아간다. 적응하는 척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삶의 양태가 공포와 절망이라는 감정에만 압도당해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숨막히는 현실에서도 자기만의 도피처가 있게 마련이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극단적으로 숨 쉬는 걸 힘들어할 만큼 억눌려 있지는 않다. 그들의 어린 시절 묘사에서 특히 그런 이물감이 강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꼴이 이렇잖아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잠재된 공포까지 포함하는 창작자의 비전이 담긴 표현이라면 나는 이 영화의 절망적인 결론에 동의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사회의 꼴이 그렇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어른이 되어서도 고스란히 지속되는 <돼지의 왕>의 주인공, 경민과 종석의 모습은 장삼이사로 학창 시절을 보낸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공포의 투사처럼 보였다. 영화가 시작하면 경민은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을 풍비박산낸 처참한 몰골로 샤워를 하고 있다. 그의 집안이 참혹하게 절단 났다는 것은 식탁에 죽어 있는 그의 아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는 아내를 죽이고 흐느끼고 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경민이 흥신소에 부탁해 찾고 있는 중학교 시절의 친구 종석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무명의 작가인데 누군가의 자서전 대필을 하고 있다. 그가 원고를 들고 간 출판사에서 그는 사장으로부터 심한 인격모독을 당한다. 공손히 사장의 욕설을 듣던 그가 출판사를 나오려 할 때 사장은 다시 한번 그의 마음에 비수가 될 말을 내뱉는다. 종석은 움찔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나온다.

이 초반 장면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일면적으로 요약한다. 그들은 번데기처럼 움츠러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종석이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온 아내에게 의처증을 부리며 화를 내는 장면은 달리 보면 그가 아직 살아갈 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경민에게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경민이 종석과 전화통화를 하고 그들이 술자리에서 중학교 시절의 얘기를 하는 것이 <돼지의 왕>의 주된 줄거리다. 집안도 좀 살고 공부도 잘하며 싸움도 잘하는 척하는 아이들에게 눌려사는 아이들 가운데서 종석과 경민은 대표적인 희생자다. 학교 다닐 때 보면 유달리 상대에게 만만히 보여서 늘 놀림감이 되는 애들이 있는데 경민과 종석이 바로 그런 캐릭터다. 이들에게 구원자가 되는 이는 학교에 제대로 다니는지 존재감조차 없었던 철이라는 친구다. 철이는 이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앙갚음해준다. 그것으로 사태가 끝나는 게 아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맨 아래쪽에 있던 1학년 아이들인 경민과 종석, 철이는 상급반 아이들로 연결된 강자들의 네트워킹에 걸려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며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싸움에서 진다.

어릴 때도 그렇고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깨달음, <돼지의 왕>이 전해주는 전언은 명쾌하고 단정적이다. 이들은 처음엔 대들려고 했으나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자 상대에게 트라우마를 주기 위해 자학하는 방법을 순차적으로 행한다. 무서운 것은 이들의 자학이, 종내는 죽음으로 끝나는 이 자학이, 상대편 승자들에게는 별다른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 다음, 울부짖는 종석을 잡던 화면은 쭉 위로 빠지며 서울 시내 전경을 비춘다. 냉정하고 무심한 느낌을 주는 그 풍경 속에서 개인들의 비극은 묻힌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식어가는 누군가의 죽음을 대다수가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그와 관계된 비슷한 처지의 패자들만 기억할 것이라는 전언은 이 영화의 주된 정조가 절망으로 일관하게끔 하는 주제의 축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 방향에서 주조된 이 비극적 정조에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그리고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삶을 버틸 만한 근거들을 하나둘씩은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그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이를테면 종석의 아내는 사이코틱한 행동을 보이는 종석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데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여건상 의도적으로 배제됐을 그들 관계의 속살은 잘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거듭된 비극을 목격한 종석이 전화를 거는 유일한 사람은 그의 아내다. 그는 아내와 전화통화하면서 어린애처럼 울먹인다. 그들 부부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건 현재를 사는 그들의 삶의 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어두운 비극으로 축조하기 위해 캐릭터와 스토리를 취사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인물에게서 전혀 양의 기운이 묻어나지 않는 것은 좀 의아하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설득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의 왕>에서의 어둡고 공포를 주는 삶의 비전은 충분히 그럴 만한 설득력이 있다. 이건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득력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상황과 인물을 실사로 창조했더라면 이런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극단적인 묘사라는 점에서 <돼지의 왕>은 어두운 판타지로 보이기조차 한다. 실제 배우들이 영화 속 상황을 연기했으면 아마도 지금 애니메이션 버전의 정서표현 효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피와 살을 가진 절망과 분노라기보다는 환유적인 맥락에서의 추상적인 질감으로 내게는 <돼지의 왕>의 비극적 세계관이 와닿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편협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식의 생명에 대한 턱없는 신뢰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편견임을 전제로 하고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정서는 일방적이었다고 말해야겠다. 그들 내부에서 음과 양의 기운이 충돌하는 지점이 전혀 없는데도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공감한 이유는 그림체 덕분일 것이다. 이 영화의 그림체는 예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때로는 비약을 마다하지 않고 툭툭 단면으로 전달된다. 그들의 절망의 이미지들은 단속적인 그림체로 똑똑, 스타카토 리듬으로 관객에게 도장을 찍는다. 아주 구체적인 현실적 소재에 기초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림체를 보며 현실의 구체적인 상이 아닌 가상으로 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그 속성상 어쩔 수 없이 판타지의 외관을 띠게 된다. 그 추상적인 환유의 폭발력을 업고 <돼지의 왕>은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감독 연상호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특장을 최대한 살려 이 시대의 분노의 기운을 힘차게 내지른다. 이렇게 외침을 담은 영화는 근래 처음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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