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우상의 환영을 발가벗긴 계급 담론의 혁신
2011-11-17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돼지의 왕> 속 철이의 죽음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돼지의 왕>은 이야기의 결말로 치달아감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중층적 비밀 구조로 흥미를 자아낸다. 15년의 시간을 비월하며 이어지는 두 친구의 하룻밤 동안의 해후를 좇는 두 갈래 플롯은 중학교 시절 종석(양익준)과 경민(오정세)의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굴절시켰던 미스터리의 속살을 야금야금 들춘다. 한국사회의 여느 장(場)들처럼 학교 역시 지배와 길들이기에 종속된 동물의 왕국에 진배없는 바, 신분 계급의 위계가 엄격한 이 세계의 생리를 학교의 시스템 안에 대입한 텍스트라면 <돼지의 왕> 이전에도 간간이 있어왔다. 다분히 문학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영화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이문열의 원작에 힘입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이나 <말죽거리 잔혹사>(2004) 등이 학원에서 암암리에 자행되는 폭력과 권력의 불평등 구조를 방임하는 체제의 모순을 캐낸 바 있다.

<돼지의 왕>은 이처럼 한국사회의 축도와 같은 중고생 시절을 통과해온 이들의 보편 체험 위에 제법 익숙한 문화적 선행학습을 더해 깊은 공감을 자아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계급 담론의 학교 버전’이라는 전형화된 서사의 패턴을 뛰어넘은 영화의 성취는 계급 구도에 대한 맹목적 도식화를 벗어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알기 쉽게 말해서 교육 현장 내부에 엄존하는 계층의 위계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미학적으로는 나이브한 계급적 분화와 투쟁의 도식을 그대로 적용했다면 <돼지의 왕>은 70~80년대를 풍미한 학원 권력 드라마의 구식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감독 연상호는 영특하게도 대대손손 힘의 우위를 지켜오고 있는 권력의 주구(走狗)들과의 투쟁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 이 스토리의 백미는 중반 이후 핵심 주제의 전환, 그러니까 핍박과 굴종을 내면화한 피지배 계층 내부의 문제를 굴착해 들어가면서부터 비로소 발휘된다. <돼지의 왕>에서 철옹성과 같은 한국사회의 계급과 권력구조의 고착화를 읽어낼 수는 있겠지만, 영화는 지난날의 경직된 계급 담론만으로 미처 설명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세태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 한다.

중층결정적 내러티브

무너지지 않는 권력관계의 단단함과 그 틈새에서 좌절한 이들의 패배주의에 대한 애가(哀歌)라는 것만으로는 <돼지의 왕>에 내재한 두터운 의미망이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기성 체제의 온존을 위해 작동하는 인습적 권위와 그에 대항하는 반역의 에너지를 묘사함에 있어 <돼지의 왕>은 두 가지 이슈를 교차하며 혼존시킨다. 각각의 이슈는 내러티브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주도하는데, 전자가 스테레오 타입화된 계급 갈등 도식이라면, 후자는 말미의 충격적인 반전으로 노출되는 계급 내부에 도사린 웅숭깊은 모순이다. 연상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론은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상상력과 태도는 자못 전복적이다. <돼지의 왕>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류의 과거 학원 권력 이야기와 구별되는 지점은 두 번째 이슈에 깃든 문제의식, 도식화된 계급 담론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참신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파시즘적 철권통치 시대에 뚜렷했던 계급의 분화는 통치의 방식이 고도화된 요즈막에는 한결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로 선명하게 분화되지 않은 미분화 상태의 계급 구조, 당파적 계급의식의 희석화 등이 나타나는데, <돼지의 왕>은 이러한 동시대의 사정을 하나의 담론적 이슈로 접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짧은 현재 시간대 위에 그 시간에 관계되는 과거사를 개입시키는 교차구성을 취한 <돼지의 왕>의 스토리 작법은 난공불락의 계급적 위계에 포박되어 한편으로 그 견고한 시스템에 안주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 반역을 꾀하는 보편 다수의 삶을 대변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폭력 앞에 주눅 들고 머뭇거리는 다수의 삶을 ‘돼지’로 칭한다. 비판적 순응자의 삶을 살아온 다수의 사람들에게 종석과 경민은 비교적 안정적인 동일시의 대상이다. 폭력의 시대에 있을 법했던 돼지들의 왕에 대한 추문을 끄집어내는 종석과 경민의 여정은 따라서 이 비판적 순응자들의 회고적 내면 탐색의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호사스런 배경과 특유의 패거리주의를 발판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주류 계급에 항거하는 초인 철이(김혜나)의 저항이 드러나지만 중반 이후부터 담화의 핵심은 선명한 계급투쟁의 장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뇌아적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의 야만성이 전반부 드라마의 주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둘 명확한 갈등구도로 후반부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간특한 미소를 흘리는 교실의 포식자들에 대한 단조롭고 평면적인 전반부의 나이브한 묘사에 비해 포식자들의 전제주의적 특권에 대한 불만 표출이 본격화되는 후반부에서 피식자들의 성격화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입체적이지 않은가.

철이로 대표되는 돼지들의 왕은 힘으로 어르고 겁박하는 포식자들을 증오하는 이들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우상(偶像)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전제가 선악이 뚜렷한 계급간의 충돌이라면 그 실질은 계급투쟁의 대리자로 내세운 우상의 허상이 드러나는 후반부에 집중된다. 철이는 파시즘적 권력의 횡포에 굴하지 않는 초인으로 폭력을 더한 폭력으로 되받아치는 괴물이다. 교실을 지배하는 패거리들에게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도 수그러들지 않는 의연함으로 인해 회색분자 경민과 종석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다. 괴물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시대, 기성의 권력 구도를 깨부수고 싶은 이들에게 철이는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의 표상이다. 그러나 마땅히 굳건함을 지켜야 할 초인이 그를 숭배하는 숭배자들조차 공포에 떨게 했던 괴물성을 스스로 벗어던지려는 순간 우상의 위상은 와해된다. 더이상 악마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철이는 여느 돼지들처럼 유순해진다. 실망스런 거사가 있던 날 옥상에서, 위풍당당한 기세가 꺾인 채 보통 아이가 지을 법한 비겁한 웃음을 흘렸을 때 종석과 경민이 믿었던 우상의 실체는 자명해진다.

여기에 이르러 <돼지의 왕>은 피지배층 내부를 감싼 허약한 계급의식의 고리를 건드린다. 한때 굴종에 찬 자신들의 삶에 한 줄기 서광을 비춰주리라 믿었던 우상이 붕괴되는 데서 오는 상실, 음험하고 집요한 기성 계급의 벽을 허물지 못하리라는 아득한 절망이 경민과 종석을 괴물로 주조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우상의 추락은 악에 맞서는 저항 기제로서 극악조차 용납하지 않는 체제의 절대적 부조리를 보여준다. 음울한 독기를 거둬낸 우상의 미소가 치욕적이었던 종석은 제 손으로 고양이의 배를 쑤신 칼부림의 의미를 끝내 격하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돼지의 왕>은 계급구조의 역학이 아니라 힘에 순응하는 이들을 잠식하는 불안의 근원을 묻는 이야기로 선회한다.

계급 담론의 재설정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자면 <돼지의 왕>이 묘사하는 계급성에 대한 확장된 인식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전 학원 권력 담론의 원형을 제시한 바 있는 전상국의 소설 <우상의 눈물>이나 <돼지 새끼들의 울음>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전상국의 두 소설은 교육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의 삶의 양식을 통해 체제에 길들여져 가는 순응자들의 비애를 예리하게 묘파한 바 있다. 두 소설에 나타난 것처럼, <돼지의 왕>은 피식자들의 가열한 저항의지를 고취하는 우상의 축조과정에 머물지 않고 그 퇴행과 파괴의 드라마가 되어가면서 참신한 이야기의 추진력을 얻는다. 우리에게 우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냐는 듯 약자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만들어낸 우상은 어느 순간부터 악마의 얼굴을 드러내고, 종내에는 신화적 외피 뒤의 허상이 발가벗겨지고 만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철이의 강인함 속에 숨겨진 소시민성, 단단하게만 보였던 계급의식의 여린 토대, 우상에게 투사된 욕망의 속절없는 좌절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이와 관련하여 극의 절정부에 나타나는 반전의 담화적 의의를 문답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서사체에서 반전이란 스토리텔링의 테크닉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인데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숙고할 때 ‘반전’은 하나의 기교라기보다 이야기의 성격을 뒤집는 근원적 인식의 전환을 동반한다고 할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반전에 도달하기까지 근간이 되어왔던 전제를 뒤집거나 역발상함으로써 인식의 충격과 반성을 유발하는 담론적 장치로서 반전은 참다운 의미가 있다. <돼지의 왕>은 ‘담론의 성질 전환’이라고 하는 이와 같은 반전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점점 벌어진 틈새를 좁히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합쳐지면서 상술되는 그날의 거사는 이야기의 뿌리를 흔들고 그때까지 우리가 따라왔던 담론의 성격을 변질시킨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변경의 신호를 보내는 비밀의 누출로 인해 계급간의 반목과 갈등의 스토리는 계급 내부의 연대보다 상잔(相殘)의 아픔을 전면에 내세운다.

<돼지의 왕>의 중층적 비밀 구조가 불가사의한 완력을 뿜어내는 것은 이처럼 약자들의 커뮤니티에 내재한 취약한 계급성, 그들 내부의 미묘한 착취구조를 드러내면서부터이다. 작중의 설정을 따르자면, 계급 내부의 결속은 강자들보다 약자들의 무리 안에서 훨씬 무르다. 권력을 쥔 자들 사이에서 힘의 분배와 균형은 얼마나 조밀하고 탄탄한가. 교실을 장악한 각종 흉포함으로부터 비껴나 온화한 기운을 풍기며 교실 분위기를 장악했던 전학생 박찬영에 대한 저들의 기민하고 가차없는 길들이기를 보라. 철이의 등장으로 인해 강민 일당의 입지가 위축되었을 때 가해지는 상층부로부터의 압박 또한 이 명제를 입증한다. 층층이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는 강자들 내부의 작은 권력 구도에 흠집이 났을 때 작동하는 폭력의 기율은 순식간에 상황을 이전 상태로 되돌린다. 반면 피식자 집단은 어떠한가? 그들은 천성적으로 유약하며 분노의 크기에 값하는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다. 안일한 순응의 제스처로 일관했던 종석과 경민은 대리자 철이를 통한 보복을 꿈꾸지만 그들의 보복이란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우상에게 투사한 적개심을 동력으로 삼은 일종의 대리전이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이 대리자로서 우상이다. 계급적 동질성에 의한 연대의식도 힘을 가진 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는 바, 종석은 경민의 굴종적 웃음을 경멸하고 경민은 철이의 야수성을 두려워하는 내부 모순을 안고 있다.

다수의 피식자들을 충동질한 우상의 성립과 파괴, 소멸에 대한 우화로 나아가기 위해 한패를 이루는 이들의 구성을 조금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종석과 경민, 철이로 구성된 이들 패거리는 단일한 계급의식으로 묶이지 않는 혼종적 공동체이다. 하층민적 삶의 표상인 철이는 무산자의 설움과 분노를 질풍 같은 폭력으로 되갚아줌으로써 단숨에 돼지들의 우상으로 떠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 소시민적 개량으로 후퇴하여 비극을 맞는다. 군림하는 권력의 횡포를 무던하게 견디는 종석은 예정된 각본에 따라 복수의 완성을 이루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전체 이야기의 관찰자이다.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경민인데, 힘있는 자들에게 빌붙는 약삭빠른 박쥐의 삶을 사는 그는 하위 계급도 아니면서 종석과 어울리며 회색분자의 모습을 보인다. 종석과 경민이 계급적 유대의식을 가질 근거는 별로 없는데, 다만 권력의 주구들에 의해 신음하는 처지라는 동질감 정도가 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 된다. 이들 삼인조는 이처럼 단일한 계급적 연대의식으로 묶이지 않는다. 종석과 경민의 계급적 기반은 상이하고, 경민에게 철이는 우상이지만 그들의 커뮤니티 바깥으로 나갔을 때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위계로 나뉘게 된다.

계급론의 패러다임을 재설정하다

그렇다면 어이하여 초인 철이는 자신의 능력을 속절없이 잃어버리고 만 것인가? 교활한 포식자들이 가끔씩 보이는 거짓 선함의 기미조차 찾을 수 없는 철이의 악마성이 유순해지는 사건에 대한 묘사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작중에서 철이의 변심은 비루한 삶이나마 연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머니를 목격하는 가라오케 에피소드에 뒤이어 발생한다.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라오케에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은 철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어떤 폭력에도 끄떡하지 않던 우상은 인간적 선의지 앞에서 순종적이 된다. 야만의 괴물성을 비집고 솟아오른 선의지가 단단했던 적개심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우상이 파괴되는 이 장면은 수구적 악의 권력이 종종 이와 같은 선의지의 지원을 업고 완벽한 체제의 성채를 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철이의 죽음은 종석과 경민이 아무리 고심해도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괴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각성해준다. 짓밟힌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욕망의 투사로서 비루한 우상화의 작업, 남한의 사회체제 안에 사는 필부들은 이와 같은 우상화와 파괴를 거듭해오지 않았던가. 거사가 있던 날 옥상에서 따로따로 만나는 이들은 씁쓰레한 기분으로 자신들의 터무니없었던 분노의 실체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권력투쟁에서의 승리가 최고의 명제였던 한국적 상황에서 계급 내부의 모순은 부차적인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지배받는 자들간의 반목과 질시, 결속의 부실함이 지배 권력에의 대항이라는 선결적 의제에 밀려 그동안 괄호 안에 넣어졌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소외되었던 의제로부터 <돼지의 왕>은 출발한다. 때문에 광의의 계급 담론으로 보자면 <돼지의 왕>은 중심이 아닌 주변부의 이야기이다. 더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향한 대항기제로서 우상이 아니라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 개체들의 유아기적 저항의 에고이즘, 그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우상화의 메커니즘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돼지의 왕>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타입의 이야기이다. 어느 시대에나 인간은 대리자로서 우상을 세우고 또 그것을 허문다. <돼지의 왕>은 우상의 환영을 까발리고 탈(脫)신화화함으로써 계급론의 패러다임을 재설정한다. 우상의 퇴행과 파괴는 15년 전 과거에만 있지 않고 이곳에서도 진행 중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철이의 죽음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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