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거슬리는 결점마저 애써 눈감아버리고픈 영화가 있다. 간간이 눈에 밟히는 결점이 있더라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냉소하기보다는,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참 좋다, 라고 말하고 싶은 영화. <완득이>가 세계의 단면적인 묘사에 머물고 말았다 해도, 생기 가득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소소하게 풀어내는 흥겹고도 정겨운 이야기는 이러한 아쉬움을 상쇄하기에 충분하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꼬방동네 사람들>로 완성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 발산하는 생동감은 근래 어떤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흥을 준다.
조화(調和)로운 조화(造花)의 낙원
<완득이>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빈곤, 장애,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결손 가정과 교육에서의 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과 달리, 그 어떤 영역에서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발생하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를 추방하거나 그들을 돕는 활동마저 제재하고 그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완득이>는 대립과 갈등의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예정된’ 조화로운 세계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한다. 이현경이 원작과 비교하며 언급했던(<씨네21> 826호), 원작의 윤하(강별) 엄마를 배제하고 핫산의 캐릭터를 변경한 것 역시 이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완득이>에서 묘사되는 동네가 현실적 질감의 비루한 공간과 인물로 가시화된다 할지라도, 영화의 전반적 서사는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기보다는 까치발을 들어 그로부터 조금은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영화적 시공간과 인물이 현재의 시간에서 몇 걸음 뒤처진 과거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이러한 느낌을 단단하게 붙들어맨다. 즉, <완득이>는 현실 세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앞세우는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갈등과 파국의 요소를 ‘미리’ 삭제한 인공의 세계를 위한 디테일한 묘사이거나, 또는 우리가 현재의 시간에서 상실한(것으로 상상되는) 조화로운 과거의 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인상 속에 현재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얼버무리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득이>에 대해 현재의 시간성을 회피하지 않은 채로, 달리 말해 과거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향수의 감수성에 의존하지 않고 다문화 사회(와 다양한 형태의 주변화된 삶)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완득이>는 다문화 사회의 동시대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현재의 시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해는 말라. 나는 지금 우리가 과거에 다문화에 대해 관용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며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상상력이 현재의 시간성을 대체한 과거의 이미지를 환기함으로써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현재보다 과거를 훨씬 조화롭고 따뜻한 것으로 ‘상상’하고, 그렇기에 향수의 감수성은 현재의 갈등과 파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로서 과거를 미화하곤 한다. 즉, <완득이>는 다문화(와 주변화된 삶)의 부상이라는 현재적인 사회적 현상을 과거의 환기를 통한 향수의 감수성을 통해 떠안으려 한다. 현재로부터 한발 비켜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그것이 <완득이>가 완성한 조화로운 세계가 ‘조화(調和)로운 조화(造花)의 낙원’처럼 비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완득이>가 표면적으로 완득이(유아인)의 성장영화처럼 보인다 해도, 그를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내적인 성장을 일구는 소년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립과 갈등의 장애물이 그리 높게 제시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그 주변 인물 하나하나가 그의 성장을 돕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킥복싱 도장의 관장(안길강)은 “맞아봐야 때리는 법을 안다”고 말한다. 완득이는 스파링에서 얼굴이 찢기고 피멍이 들어 링 위에 나뒹굴면서도 그제야 크게 웃는다. 하지만 링 바깥의 세계에서 두들겨맞을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완득이가 그만큼 충분히 얻어맞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조화(造花)의 인공 세계는 그의 악조건에 어울리는 강펀치를 좀처럼 날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링은 세상살이의 은유로 영화에 놓여 있지만, 실상은 진짜 세계의 작동이 멈춰 있다는 사실을 은닉하는 도구인 셈이다. 완득이의 성장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향기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폐의 방에서 연대의 공간으로
하지만 <완득이>는 이러한 결점에 애써 눈감아버리도록 유혹하는 힘이 있다. 이는 무엇보다 <완득이>가 주변화된 인물 각각을 ‘자폐적 방’에서 끄집어내 서로 소통하게 하는 과정의 생동감과 그 영화적 태도 덕분일 것이다. <완득이>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과거의 인물처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시대의 낙오자로서 주변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빈곤, 장애, 이주 노동자,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심에서 탈락된 주변화된 이들이 두텁게 층을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주변부의 영역을 ‘계급’이라는 단어로 포괄할 수 없는 현실이 당도한 지 오래다. 독립영화 계열의 비주류영화들은 주변화된 삶을 향해 이미 오래전부터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2011년의 주류영화 진영 역시 뒤늦게나마 <도가니> <오직 그대만> <완득이>(넓게 본다면 <써니>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을 통해 다양한 화법으로 주변부의 삶을 영화에 끌어들이고 있다. <완득이>는 이러한 주변부의 삶을 섣불리 중심으로 되돌리려 하지 않고 <써니>처럼 필요 이상 요란 떨지 않으면서도 주변부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 달리 말해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과도 같은 활력을 발산한다.
<완득이>의 소소한 사건들에 연계된 인물들은 얼핏 개인주의자의 형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취향과 내면의 차이를 바탕으로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며 자유의 삶을 지향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세상을 체념한 채 자기방어적인 자폐의 방에 스스로를 격리한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방’(또는 집)은 안락과 평온함이 아닌, 사회적 소외를 수동적으로 수용한 회피의 장소이며, 때문에 그들은 세상과 마주하기를 포기하고 자폐적 세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완득이>는 마치 “얌마, 도완득” 하며 완득이를 방 바깥으로 불러내는 똥주(김윤석)의 외침처럼, 자폐의 방에 수감된 인물들을 그 바깥으로 끌어내 서로가 마주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런 그들이 영화 종반부에 다 함께 모이는 장소가 교회라는 사실에서, 그들을 향한 현실적 구원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마주볼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태도가 드러난다. <완득이>는 중심은 좁아지고 주변은 확장되는 이 시대에 주변부 인생들의 소통과 연대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완득이>의 (예상 밖) 흥행에는 주변부의 소통과 연대라는 대중의 집단적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현시대에 부상하는 대중의 정서 구조의 일면은 아닐까? <완득이>에서 이러한 연대의 기회를 마련하는 이는 똥주다. 김윤석은 송강호의 반대편에 위치한 배우처럼 보인다. 어리숙하면서도 정겨운 듯한 모습 속에 손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의 차가움이 배어 있는 배우가 송강호라면, 김윤석은 왠지 지쳐 보이고 세상만사 무심한 듯한 표면의 건조함 속에서도 어느새 스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온기가 느껴지곤 한다. 똥주가 무심한 척 주변부를 배회하며 꽁꽁 얼어붙은 주변부의 삶을 하나의 물길로 녹여내는 과정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역시 김윤석의 이러한 매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조화의 인공적 세계에 터를 두는 아쉬움이 있다 해도, 비루한 것들의 소통과 연대로부터 비롯되는 긍정과 낙관의 힘은 <완득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 발산하는 흥겨움이 함께한다면, 굳이 중심에 서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